정보라 작가 "현실 확대하고 재배치하면 비현실적 이야기"
단편선 '아무도 모를 것이다' 출간…필명 시절 초기작 모아 "역사나 현실서 소재 찾아…흥미롭거나 화가 나서 쓴 작품"
이은정
입력 : 2023.01.28 07:00:00
입력 : 2023.01.28 07:00:00

[ⓒ Hyeyoung.퍼플레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창피해서 읽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눈 질끈 감고 그대로 냈어요." 정보라(47) 작가가 최근 자신의 초기작을 모은 환상문학 단편선 '아무도 모를 것이다'(퍼플레인)를 펴냈다.
정보라로 주목받기 10여 년 전부터 필명 '정도경'으로 쓴 단편 9편과 미발표작 '비 오는 날'을 묶었다.
기이하고 오싹한 비현실적 세계에 냉엄한 현실과 잔혹한 복수를 심는 '보라 월드'의 기틀이 된 작품들이다.
최근작보다 거침없는 필치에 '날 것' 같은 서사가 묘한 뉘앙스를 자아낸다.
지난해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화제가 된 그는 올해 이 책을 시작으로 장편 2편과 신작 연작소설집까지 4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최근 전화로 만난 정보라는 "제 소설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며 "출판사 제안을 받고서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싶었다.
다시 손을 보지 않고 30편 정도를 우르르 보냈더니 출판사가 그중 선별했다"고 말했다.
수록작은 환상문학 웹진 '거울'과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지에 게재했거나 단편집에 수록한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평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나 '환상적 리얼리즘' 같은 형용모순에 걸맞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 '작가의 말'에 썼듯이 정보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스스로 "극사실주의 작가"라고 여긴다.
그는 "항상 현실에서 소재를 얻는다"며 "그 소재를 크게 확대하거나 한국과 거리와 시간상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맥락에서 떼어내 이야기 안에 재배치하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각 조각은 모두 있었던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슬라브 문학 전공자인 그는 단편 '네순 사프라'(Nessun sapra)와 '완전한 행복'의 소재를 러시아 역사에서 캐냈다.
'네순 사프라'는 두 러시아 작가의 삶을 조합해 지었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체포된 작가들이다.
소설은 정신병원에 갇힌 유명 작가를 향한 간호사의 기괴한 사랑을 그렸다.
이번 소설집 제목도 이탈리아어 '네순 사프라'('아무도 모를 거야'란 뜻)에서 따왔다.
그는 "논문에선 쓸 수 없는, 두 작가에 관해 전해진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고 싶었다"고 했다.
'완전한 행복'은 그가 대학에서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강의할 때 16~17세기 러시아 암흑 시기의 '참칭자 드미트리'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복수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정의를 위해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처단하며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에게 이야기를 불러오는 또 다른 원천은 '화'(火)다.
단편 '나무'는 오래전 읽은 일본 SF에서 성범죄의 표적이 되는 상황에 순응하는 전개에, 지난해 미국 출판사 호러선집에 수록된 '가면'은 무수한 여성들의 이유 없는 죽음에 "돌아버릴 만큼 화가 나서" 썼다.
이중 '가면'은 빌라를 배경으로 한 오싹한 이야기로 환영이 안긴 쾌락에 중독돼 방안에만 머무는 남자가 등장한다.
정보라는 "다세대 주택이나 공사 현장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뉴스나 방송을 많이 접했다"며 "안전하지 않은 주거지에 사는 여성들의 사건을 보면 현실이 제일 무섭다.
갑작스러운 불행이나 공포가 나를 덮치는 건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수록 작품들은 소설집 '저주토끼'에서처럼 초자연적이고 기묘한 색채가 짙다.
'나무'에선 아이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무가 되고, '머리카락'에선 머리카락에 휘감긴 세상에서 집안에 고립된 여성이 마치 스토커처럼 옆집 남자 일상에 두 귀를 집중한다.
이번에 처음 발표한 '비 오는 날'에선 "그녀의 왼쪽 신발에" 사는 원귀가 화자다.
옛날이야기나 민담을 좋아하는 그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 속 대사인 "내 다리 내놔"를 소설에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에선 사람이 시체의 다리를 자르러 가는데, 반대로 귀신이 여자 다리를 훼손하는 설정으로 변주했죠."

(런던=연합뉴스) 2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원메릴본에서 개최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에서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와 안톤 허 번역가가 책을 들고 함께 서 있다.2022.5.27 [그린북 에이전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그는 이 소설집에 이어 구미호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장편 '호'와 밀리의서재에서 다음 달 먼저 공개할 SF 장편 '고통에 관하여', 6월 신작 연작소설집을 내놓는다.
"지난해 영어로 번역 출간된 작품이 없어 올해 부커상 후보에 오를 자격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거리에서 '투쟁하는 작가'로서의 행보도 변함없다.
지난해 그는 약 11년간 시간강사로 일한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내 이목을 끌었다.
그는 "최근 청구취지를 변경했는데 재판부가 받아들일지는 3월 재판이 열려야 안다"고 했다.
최근에는 대구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에 부딪힌 무슬림 유학생들에게 힘을 보태고, 이태원 참사 추모 집회에도 참여했다.
'글 쓰랴, 집회에 참여하랴' 열정적이란 말에 그는 말했다.
"이러니까 마감을 못 하고 있죠." mimi@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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