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21세기 우리는 왜 다시 '호머 헐버트'를 소환하는가
박기태 반크 단장
우분투추진단
입력 : 2025.07.24 07:00:01
입력 : 2025.07.24 07:00:01

[박기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19세기 말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서구에 처음 알려졌다.
신비롭고 순수한 이미지로 각인된 이 표현은 오늘날까지도 자주 인용된다.
때로는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표현에 감춰진 식민주의적 오만과 왜곡을 꿰뚫어 보고, 한국의 참모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 미국인이 있었다.
바로 호머 헐버트 박사다.
그의 불꽃 같은 삶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또 다른 형태의 편견과 싸워야 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한다.
◇ 호머 헐버트, 구한말 조선을 향한 뜨거운 열정 1886년, 23세의 젊은 청년 호머 헐버트는 미들베리 대학 총장이었던 아버지와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 후손인 어머니를 둔 명문가 자제라는 안정된 배경을 뒤로하고 미지의 땅 조선에 발을 디뎠다.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 밖에 있던 작은 나라, 한국의 가치를 세계에 각인시키기 위해 그가 보여준 노력은 초대 대한민국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추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뉴욕트리뷴에 한국어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기고문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를 게재했다.
또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서울=연합뉴스) 국립한글박물관이 '한글로 세계를 바라보다,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발간했다고 8일 밝혔다.사민필지(士民必知)는 19세기 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91년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한글 세계 지리 교과서다.사진은 '한글로 세계를 바라보다,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부록.2020.10.8 [국립한글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그는 독립신문의 창간을 도왔고, 아리랑을 서양 음계로 편곡해 세계에 소개했다.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현수교, 비격진천뢰 등 한국의 주요 발명품도 서구사회에 널리 알렸다.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 단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종합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집필했다.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총 20권의 단행본과 304편의 논문·기고문을 통해, 당시 세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을 국제사회 속에 새겨 넣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헐버트 박사의 진정한 위대함은 단순히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진심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왜곡된 편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행동으로 나섰다는 데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실패와 무능으로 규정했다.
일제는 한국인을 더럽고 게으르며 주체성이 없는 존재로 깎아내렸다.
헐버트는 이러한 일제의 평가에 격분했다.
특히 그는 유명 역사학자 그리피스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피스가 한 번도 조선에 와본 적이 없는 채 일본에 머물며 조선 관련 책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그리피스는 한국인을 당시 서구가 아프리카 소수 민족을 깎아내릴 때 사용한 '피그미'(Pygmy)에 비유해 '난쟁이 제국'으로 표현했다.
이에 헐버트는 "한국인을 미개하고 지능이 낮은 열등 민족으로 표현했다"며 반박 글을 기고했다.
무엇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에 대한 그의 집요한 수정 요구는 헐버트 정신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퍼시벌 로웰이 1885년에 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접한 그는 조선의 국호 '조선'(朝鮮)의 '선'(鮮)'을 '밝다 선'이 아닌 '고요할 선'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닌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로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고요하다'는 표현이 한국을 수동적이고 문명이 없는 나라로 비춰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식민 지배의 정당화에 악용될 수 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한국인조차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그 시절,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홀로 분투했다.
그의 삶은 이방인의 헌신을 넘어선 진정한 애정의 표출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기념우표 64만 장을 12일 발행한다고 밝혔다.기념우표는 총 2종으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헐버트와 베델의 모습을 담았다.사진은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헐버트 기념우표.2022.8.12 [우정사업본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오늘날 헐버트라면 아프리카 바로 알릴 것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헐버트 박사의 헌신적인 삶을 뒤늦게 접하고, 대한민국 청년이 21세기 호머 헐버트가 돼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가 한국을 알리는 일만으로 헐버트 박사의 뜻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일까.
만약 헐버트가 2025년의 세상에 청년으로 돌아온다면,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단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전력을 다했을까.
그가 이미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2억명의 한류 팬을 보유한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선 지금의 한국을 단순히 알리려 집중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그가 살아온 방식처럼 이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에 날 선 비판을 던졌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100년 전 무명에 가까웠던 한국처럼, 오늘날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륙, 바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편견이 한국 사회에서조차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크가 국내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아프리카 서술을 분석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와 중학교 사회 교과서는 아프리카를 원조와 봉사의 대상으로 묘사한다.
또 기아, 내전, 질병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지나치게 치우친 사례로 서술된 내용이 다수 발견됐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또한 유럽의 신항로 개척을 다룬 부분에서 아프리카 문명이 부재했던 것처럼 묘사하는 오류를 범했다.
21세기로 돌아온 헐버트 박사가 이 교과서를 접했다면 그의 얼굴은 굳어졌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다룬 장면에 편견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국인이 이럴 수 있나"라며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교과서를 들고 교육부로 향했을 것이다.
담당자를 만나고, 장관을 찾아가고 외교부에도 들렀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따져 물었을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 교과서의 아프리카 인식 개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잘못 알려진 아프리카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리는 데 앞장섰을 것이다.
반크의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브리태니커, 위키피디아,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해외 유명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에서는 여전히 아프리카 대륙을 '가난', '기아', '질병', '분쟁', '부패', '원시성', '후진성' 등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또 54개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하나의 단일한 대륙으로 일반화하는 서술이 다수 발견된다.
100년 전 서구인들이 한국을 '피그미'로 비유했듯이, 일부 사전에서는 아프리카를 '암흑대륙', '검은 아프리카', '제삼 세계' (Third World), '부시맨', '호텐토트' 등 식민주의 시대의 인종차별적 용어로 표현하거나 아무런 경고 없이 사용되고 있다.
◇ 우리는 21세기 헐버트, 우분투 홍보대사 100여 년 전 한국을 향한 국제사회의 표현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을 향한 '암흑대륙', '검은 아프리카'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바로 한국과 아프리카를 향한 진정한 가치가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왜곡된 인식을 바꾸고자 평생을 바쳤다.
그의 꿈은 오늘날 2억명의 한류 팬을 보유한 문화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이 됐다.
이제 21세기 호머 헐버트로서 우리는 100년 전 한국 땅을 처음 내디뎠던 청년 헐버트처럼 중대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다.

[반크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편견과 싸웠던 헐버트처럼, 이제는 우리가 아프리카인을 대신해 아프리카를 향한 세계인의 편견을 바꾸고 아프리카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 나가야 할 때다.
아프리카는 단순히 원조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력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대륙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풍부한 역사, 다양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역동적인 에너지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우분투'(Ubuntu)는 남아프리카 반투어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을 지닌 아프리카 정신이다.
상호 연결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21세기 헐버트로서 아프리카를 세계에 알리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우리가 아프리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알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상생과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헐버트이자 우분투 홍보대사로서, 아프리카의 진정한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위대한 여정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이것이야말로 헐버트 박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대적 소명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박기태 단장 현 반크 단장, 재외동포청 정책자문위원, 재외동포정책실무위원, 직지 홍보대사 활동 중, 외교부·대검찰청 정책자문위원, 청와대 청년위원회 위원,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 KOICA 홍보전문위원, 국제교류재단 공공외교홍보대사, 서울시 홍보대사 등 역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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