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연구개발(R&D)에 진심인 '2등주' 주가가 눈에 띄게 오르고 있어 주목된다. 미국 정보기술(IT) 업종의 아마존과 AMD, 한국 전기전자 업종의 SK하이닉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 업종에서 2, 3위를 차지하지만 올해 주가 상승률은 1위 기업을 뛰어넘는다. 주가 약진의 이면에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격언에 따라 경기가 악화돼도 매출 대비 R&D 투자를 유지하는 뚝심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투자자가 몰리는 것이 주가 상승 배경으로 분석된다. 특히 미·중 갈등이 완화되는 가운데 중국 의존도가 높으면서 꾸준히 R&D 투자를 늘려온 한미 기술주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매일경제는 블룸버그 자료를 통해 한국과 미국 각각 시가총액 상위 50곳의 R&D 비용과 최근 분기 실적을 분석했다.
미국에서 최근 분기 R&D 투자비가 가장 많았던 곳은 아마존으로 3개월 새 26조원을 썼다. R&D는 영업비용으로 잡히기 때문에 이를 지출하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영업이익에 반영됐을 돈이다.
아마존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지만 아마존웹서비스(AWS)로 대표되는 클라우드 사업 규모도 전 세계 1위다. R&D 초점도 전자상거래보다 클라우드 사업에 맞춰져 있다. 앤디 재시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오랫동안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사업에 투자해왔다고 밝혔는데 말 그대로 회계 숫자에 찍혀 있다.
최근 아마존이 '베드록'이라는 기업용 클라우드 서비스를 출시한 것도 막대한 R&D 투자의 산물이다. 2020년 R&D에 50조원을 지출했던 아마존은 2021년 64조원에 이어 작년에도 94조원을 쏟아부었다. 아마존은 1억달러를 투자해 '생성형 AI 혁신센터'를 설립한다고 최근 밝혔다. 이 센터는 아마존 고객이 AI를 통해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이에 따라 아마존은 사상 처음 올해 연간 R&D 비용이 1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비용 대비 실적도 나쁘지 않다. 2분기(4~6월) 아마존의 예상 영업이익은 5조790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8.4%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 주가는 올해 들어 22일(현지시간)까지 52% 올랐는데 빅테크 1위 애플(50%)보다 더 높게 날아올랐다.
애플은 최근 분기에 R&D 투자비로 9조5180억원을 집행했는데 이는 매출 대비 7.9%에 그친다. 이 빅테크 1등주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R&D보다 잘 팔릴 제품의 구성과 설계에 집중한다. 다른 곳보다 R&D 투자를 늘릴 이유가 적다. 그 대신 인건비 등 판매관리비 지출이 적은 편이어서 인플레이션 시대 주가 수익률이 높게 나온다. 매출 대비 판관비 비중 역시 6.5%에 그쳐 미국 분석 대상 50곳 중 가장 낮았다.
올 상반기를 강타한 AI 시장 1등주는 엔비디아다. 주가도 올 들어 3배 이상 올랐다.
2분기 예상 영업이익은 7조3475억원이다. 월가는 전년 동기 대비 이익이 11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엔비디아의 추격자는 AMD다. 컴퓨터 두뇌 격인 중앙처리장치(CPU)에선 인텔과 경쟁 중이고, AI 반도체 시장에선 엔비디아 등과 격전을 벌인다. 수많은 회사와 경쟁하다 보니 자연스레 R&D 투자를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해왔다. AMD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R&D 투자를 2년 새 3배가량 늘렸다. 2020년 2조3408억원에서 작년 6조4682억원으로 키웠다.
엔비디아는 같은 기간 2배 늘려 작년에 9조5129억원을 집행했다. 투자 규모 자체가 다르니 매출 대비 R&D 비중을 보면 AMD(26.4%)가 엔비디아(25.9%)를 근소하게 앞질렀다. 최근 5년 주가 수익률에선 AMD가 660% 올라 엔비디아(580%)에 앞서 있다.
AMD의 올 2분기 영업이익은 1조3486억원으로 예상된다. 2022년 같은 기간보다 54.6% 증가한 수치다.
업종별로 보면 IT와 바이오 분야 상장사의 R&D 투자가 활발하다. 미국에서 매출 대비 R&D 비중 상위 5곳이 메타(29.9%), 머크(29.5%), 일라이릴리(28.5%), AMD, 엔비디아 등으로 추려진 이유다. 분기 결산 월이 달라 최근 3개월(분기) 기준으로 통일했다. 지난 1분기 매출 대비 R&D 비중 기준으로 국내에선 SK하이닉스(18%)가 가장 높았다. 삼성전자(10.3%), 삼성바이오로직스(7.9%), 삼성SDI(5.8%), 삼성전기(5.7%) 등이 뒤를 따랐다.
미국 등 글로벌 초대형 기업은 어떤 경기 상황에서도 돈을 벌 수 있어 꾸준한 R&D 투자 비중을 유지하기 쉬운 편이다.
국내 상장사는 전 세계 경기 동향에 따라 재고와 비용이 급등락하는 일이 반복된다. 불황기엔 R&D 투자비를 줄여 이익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SK하이닉스는 작년에 매출 44조원을 올리면서 매출 대비 10%에 달하는 4조원의 R&D 투자를 단행했다. 올해 1분기엔 이 비율이 18%까지 올라왔다. 반도체 업황 악화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단기 실적을 방어하려는 '꼼수' 대신 R&D 투자를 유지하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같은 메모리 반도체 회사 삼성전자는 작년 매출 대비 R&D 비율이 8.2%였고, 올 1분기엔 10.3%로 나타났다. 회계상 SK하이닉스가 좀 더 건전하다는 점은 매출 대비 판관비 비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 분기 삼성전자의 매출 대비 판관비 비중은 15.6%였지만 SK하이닉스는 14%로 나타났다. 두 회사 모두 2분기 영업이익 예상치가 1년 전보다 극도로 악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기업 주가는 시장보다 더 올랐다.
SK하이닉스 주가가 올 들어 지난 20일까지 53% 오를 동안 삼성전자와 코스피는 각각 28.5%, 17% 상승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뚝심을 알아본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외국인은 SK하이닉스 주식을 1조7000억원어치 순매수했다.
같은 방식으로 외국인이 올해 삼성SDI에 1조원 넘게 투자(순매수)한 것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비상장) 등을 포함한 국내 배터리 3개사는 좀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전기차용 배터리 개발에 집중 투자 중이다. 투자는 크게 R&D와 공장 신증설로 나뉘는데 국내 업체들은 이미 수주받은 물량에 따라 공장 쪽에 좀 더 많은 투자비를 집행하고 있다. 이 중 투자비 규모와 매출 대비 비중 모두 1위인 회사가 삼성SDI다. 지난 1분기에만 R&D에 3000억원 넘게 투자해 매출 대비 R&D 비중이 5.8%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