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가 회복되는 시점이 계속 늦춰지면서 올해 국내 상장사 실적에 대한 '눈높이'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증시도 반전 모멘텀을 찾지 못한 채 장기 횡보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상장사들은 작년 4분기 실적발표에서 이미 시장 예상치보다 낮은 '어닝 쇼크'를 잇따라 시장에 안겼다. 올해 1분기 역시 업종을 가릴 것 없이 온통 먹구름이다. 코로나19 특수로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을 누렸던 해운과 정유 업종 역시 예외가 아니다.
23일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국내 상장사 가운데 증권사 3곳 이상이 실적 전망을 내놓은 139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최근 1개월 사이 전체 39개 업종 중 71%에 해당하는 28개 업종의 1분기 평균 영업이익이 하향 조정됐다. 영업이익과 순이익 전망치는 1개월 전 예상치에 비해 각각 19.2%와 32.5% 낮아졌다. 매출액 전망치가 최근 1개월 새 2.5%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매출보다 수익성이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1분기 영업이익 예상치가 최근 한 달간 가장 큰 폭으로 하향 조정된 업종은 글로벌 경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해상운수(-49.1%)로 집계됐다.
해운업은 코로나19 기간에 가파른 운임 상승에 따라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 이후 운임 하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여기에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 물동량 자체가 줄면서 올해 '대침체'를 겪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작년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HMM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799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4.6% 급감할 것으로 예측된다. 팬오션의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26.1%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장기 계약 운임은 전년보다 크게 떨어질 것"이라며 "하반기에는 신규 선박이 대거 시장에 들어올 예정이어서 이익의 바닥을 예측하는 게 쉽지 않다"고 밝혔다.
철강과 화학업종의 실적 전망치도 중국의 수요 부진에 따라 큰 폭으로 조정됐다. 금속·광물 업종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는 최근 한 달 동안 28.4% 내려가 1조3954억원으로 떨어졌다. 이는 전년 동기에 비해 60.8% 감소한 수치다. 화학 업종의 1분기 영업이익도 한 달 전보다 27.8% 하락한 1조3303억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은 39.5%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경기 민감주인 두 업종에는 한 가지 변수가 있다. 다음달 중국의 최대 정치 이벤트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계기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실시되면 수요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이로 인해 주가는 실적 부진에도 최근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포함된 반도체와 관련 장비 업종은 올 1분기에 합산 영업이익이 1600억원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 1분기 17조원을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반도체·관련 장비 업종은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조2847억원 흑자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후 반도체 경기 등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어지면서 대폭 줄었다.
정명지 삼성증권 투자정보팀장은 "상장사들의 수출 비중이 높기 때문에 올해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로 실적 전망치 조정은 불가피하다"며 "반도체 업종 부진이 전체 실적을 끌어내리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은 2조4206억원으로 전년 동기(14조1214억원) 대비 83% 급감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해 4분기 10년 만에 처음으로 영업적자 1조7000억원을 기록한 SK하이닉스는 더 문제다. 올해 1분기 적자 규모가 2조6569억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플레이 업종도 정보기술(IT) 기기 수요 부진의 직격탄을 맞아 적자 폭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LG디스플레이의 올해 1분기 영업적자 추정치는 한 달 전 6733억원에서 현재 8219억원으로 22% 불어났다. 올해 2분기에도 영업적자 5758억원이 예상돼 LG디스플레이는 5개 분기 연속 적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 우려에도 불구하고 올해 1분기 영업이익 전망치가 상향 조정된 업종은 휴대폰·관련 부품(9.4%) 건축소재(8.3%) 섬유·의복(4.5%) 바이오(3.1%) 내구소비재(2.6%) 전기장비(1.4%) 은행(1.3%) 자동차(1.0%) 등 8개다. 이 중 바이오와 자동차 업종의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9.3%, 27.8%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업종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 자동차 가격 인상에도 유럽 차량 출고가 원활해지면서 판매량이 회복세를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유럽 시장 합산 점유율은 지난해 12월 6.8%까지 하락했지만 지난 1월 9.4%로 지난해 평균 수준을 회복했다. 유지웅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와 기아는 1월 유럽 현지 생산 거점인 체코와 슬로바키아 공장 출하량이 늘어났다"며 "2월 이후 유럽 전체 판매량은 회복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