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 과거엔 '직고용 정규직'…외환위기 이후 '개인사업자'로 전환해외선 직고용 사례 적지 않아…법적지위 상관없이 노조 설립·가입 허용
우혜림
입력 : 2023.06.28 06:17:00I수정 : 2023.06.28 08:15:12
(서울=연합뉴스) 우혜림 인턴기자 =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택배기사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가열되는 모습이다.
김슬기 비노조 택배 연합 대표는 지난 14일 국민의힘 민생특별위원회가 주최한 택배산업 종사자 간담회에서 "택배기사는 모두 개인사업자인데 전 세계에서 개인사업자에게 노조를 만들게 허용해주는 나라는 없다"며 "택배노조라는 것 자체가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부분의 택배기사가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형태로 계약을 맺기 때문에 노조를 결성할 수 없고, 이를 허용해주는 외국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택배기사 노조를 허용하는 나라가 없다는 김 대표의 주장은 사실일까?
대화 촉구하는 택배노동자들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26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CJ택배공동대책위원회가 연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 사회적합의 이행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택배기사 등의 참가자들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합의 이행'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2022.2.26 seephoto@yna.co.kr
고객이 물품을 주문한 뒤 배송이 이뤄지기까지 택배 업무는 크게 '집화-운송-대분류-운송-소분류-배송'의 6단계로 이루어진다.
이중 택배기사는 기본적인 배송 업무 외에 주문된 물품을 인수하는 집화 작업과 이를 각 지역 터미널에서 분류하는 작업 등을 주로 담당해왔다.
우리나라 택배기사의 업무 형태는 다양하지만 택배회사(본사)에 직접 고용되기보다는 본사와 위·수탁 계약을 맺은 지역별 대리점과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대리점과의 계약도 고용보다 위·수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의 2017년 보고서 '서울지역 택배기사의 노동실태와 정책개선방안'에 따르면 서울지역 택배기사 500명 중 80%가 본사가 아닌 대리점과 계약을 맺었고 이중 위탁(위임·도급) 계약 비율이 88.7%였다.
이러한 업무 방식 때문에 택배기사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여겨진다.
서울지역 택배기사들의 계약 형태 [출처=서울노동권익센터.재판매 및 DB 금지]
택배기사가 처음부터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맺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의 2022년 보고서 '택배 노동자의 노동 및 안전보건 현황과 과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택배 서비스가 도입된 1990년대 초 국내 택배사들은 택배기사를 비롯한 택배 노동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했다.
당시 택배기사는 단순한 직원이 아닌 최일선에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업사원으로 대우받았으며 택배업은 임금과 노동조건, 고용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좋은 일자리'로 인식됐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택배 사업에 대한 정부 규제가 완화되면서 택배기사들의 지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 언론 보도를 보면 국토교통부(당시 건설교통부)는 신고 후 허가를 받아야 했던 택배 요금을 자율화하고 사업 제한 조건을 없애는 등 택배업을 자유경쟁 체제로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택배업체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경쟁이 심해지자 택배사는 직영으로 운영하던 대리점을 위탁 계약으로 바꿔 관리 비용을 절감했다.
이에 더해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택배사는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택배기사 고용을 위탁 대리점으로 외주화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2017년도 노사관계 실태분석 및 평가' 보고서에서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의 택배업체는 택배기사들에게 개인사업자 등록과 함께 개인소유 화물차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택배 물량을 주지 않겠다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택배기사들은 노동자에게 개인사업자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추석 택배는 전쟁 서울 구로구 CJ대한통운 구로지점에서 택배 기사들이 분류 작업에 한창이다.2016.9.8 chc@yna.co.kr
택배기사의 지위가 이처럼 달라진 뒤 택배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통합물류협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약 2억개였던 국내 택배 물량은 2021년 약 36억2천만개로 급증했으며 이에 따른 매출액은 같은 기간 6천466억원에서 8조5천887억원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 전체 국민 1인당 택배 이용은 2020년 기준 연 65.1개로 일본(연평균 35개)의 2배에 가깝다.
택배물량 및 택배산업 매출(2001-2021년) [출처=국가물류통합정보센터.재판매 및 DB 금지]
반면 국내 택배 산업이 급성장하는 동안 택배 평균 배송 단가는 떨어졌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평균 택배 운송단가는 2000년 3천500원에서 2020년 2천221원으로 1천200원(36%) 이상 낮아졌다.
택배회사들의 물량 확보 경쟁이 택배 단가 인하 경쟁으로 이어진 탓이다.
낮은 택배 단가는 집화나 배송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택배기사의 수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서울연구원의 2021년 보고서 '택배기사 근로환경 문제와 개선방안'에 따르면, 2020년 택배 단가를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 택배기사가 실제로 받는 배송 수수료는 박스당 616원이었다.
국내 택배시장 평균단가 추이 [출처=국가물류통합정보센터.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택배기사는 대리점과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택배회사에 수수료 인상을 요구할 수 없고 장시간 일할 경우에도 근로기준법상 초과수당을 받을 수 없다.
반면 개인사업자로서 택배기사의 업무 자율성은 높지 않은 편이다.
한국사회법학회의 2021년 논문 '택배기사의 노동 현황과 산업재해 예방 방안'에 따르면 택배기사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집화에서 배송까지 단계마다 정보를 입력해야 해 사실상 택배회사부터 임금노동자에 준하는 관리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이중적 지위로 인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택배기사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택배연대노조)이 출범하면서 택배기사의 고용과 처우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2017년 당시 고용노동부는 택배기사들이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맺었음에도 택배회사와 대리점으로부터 상당한 지휘와 감독을 받는다는 점 등을 들어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택배연대노조에 노조설립 필증을 발급했다.
이어 서울행정법원은 2019년 택배기사를 노동조합법상 노동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노동조합법은 헌법에 의한 근로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개별적 근로관계를 규율하기 위해 제정된 근로기준법과 목적 등이 다르다"라며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사업자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노동조합법상 노동자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서울행정법원은 올 1월 CJ대한통운을 택배연대노조의 사용자로 인정해 단체교섭에 응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같은 과거 정부와 법원의 판단에 비춰보면 택배기사는 법상 개인사업자라고 할지라도 노동조합 설립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