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럽과 미국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지 갈림길에 있다."(투자은행(IB) 업계 고위 관계자)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해 국내외 유수 매체들이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을 조망했습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6조8600억달러로 2012년(16조2540억달러) 대비 1.6배 성장했습니다. 반면 서구 사회에서 미국과 양대 축을 형성해온 유럽 GDP는 지난해 15조700억달러로 2012년(14조6501억달러)과 거의 비슷합니다. 미국만 나 홀로 성장한다는 이야기죠.
여러 요인이 지목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미국으로 '돈과 사람'이 몰린다는 겁니다. 그 핵심에는 인센티브(돈)가 있습니다.
같은 자본주의를 운영하고 있지만 미국은 투자 중심인 데 반해 유럽은 은행 대출 중심입니다. 투자와 대출은 다릅니다. 투자는 원금 손실 위험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과가 나면 확실한 보상이 따릅니다. 반면 대출은 원리금 손실 위험이 투자에 비해 낮다는 장점이 있지만 미래 혁신성장 기업보다 담보 등 안전자산이 있는 기업에 주로 이뤄집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대출 비중이 작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하는 기업대출(NonFinancial Corporate Debt) 자료를 보면 2022년 기준 미국은 GDP 대비 기업대출 비율이 78.06%입니다. 그러나 유럽 주요국, 가령 프랑스는 161.96%에 달합니다. 스위스(143.09%), 네덜란드(136.8%), 스페인(93.31%) 등도 미국보다 기업대출 비율이 높습니다. 독일(72.84%), 이탈리아(68.5%)만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이제 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을 살펴보겠습니다. 시가총액이란 해당 국가 주식시장에 상장한 기업가치를 모두 더한 값입니다. 해당 국가 증시에 얼마나 자금이 투자됐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입니다.
글로벌 투자 분석 사이트 '구루포커스(Gurufocus)'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기준 미국의 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은 179.4%에 이릅니다. 하지만 프랑스(124.58%)를 제외한 독일(57.62%), 스페인(55.25%), 이탈리아(38.9%) 등 유럽 강국 모두 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이 낮습니다. 투자자금이 몰리다 보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전 세계 유수 인재와 돈이 미국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테슬라, 엔비디아 등과 같은 혁신기업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현재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미국과 유럽 사이라고 말합니다. 미국만큼 혁신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유럽처럼 보수적이지도 않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위의 통계를 대입해보면 한국의 GDP 대비 기업대출 비율은 2022년 기준 119.64%로 미국보다 높지만 유럽 주요국(프랑스 등)에 비해서는 낮습니다. 한국의 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은 지난 2월 기준 98.24%로 미국보다 낮지만 독일, 이탈리아보다는 높습니다.
투자와 관련된 한국 자본시장의 성장은 지난 20년간 괄목할 만합니다.
자본시장은 크게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이 거래소에 상장하는 기업공개(IPO), 중견·상장사 등 큰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사모펀드(PE), 회사채 발행(DCM) 등으로 나뉩니다.
20년 전에 VC와 PE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국내 벤처투자액은 15조9000억원, PE·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인수·합병(바이아웃 기준) 거래액은 71조5030억원에 달합니다. 90조원에 이르는 자금들이 신생기업인 스타트업 혹은 성장성이 높은 중견기업이나 상장사로 향한 것입니다. PE 쪽에서는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97억달러(약 13조원)로 재산 1위에 등극하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한국 부호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VC 쪽에서는 한 유명 인사가 투자 대박으로 1000억원을 벌었습니다. 미국처럼 우리도 자본시장 성공 신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문제는 최근 한국이 유럽의 길로 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2022년 이후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자본시장은 죽고 기업대출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금리로 기업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투자가 경색됐고 이로 인해 기업들이 자금조달 창구로 대출을 더 늘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기준 벤처투자액과 인수·합병 금액은 각각 10조9133억원, 30조6458억원을 기록했습니다. 2년 전에 비해 반 토막이 났습니다. IPO를 담당하는 증권사 고위 임원은 "고평가된 투자자산을 누군가 받아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자본시장이 확 죽은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IPO 공모를 통한 기업 자금조달 금액도 2021~2022년 주식 호황기 때는 연간 15조~19조원에 달했지만 지난해에는 3조3000억원에 그쳤습니다.
반면 기업대출은 최근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예금 취급기관의 기업대출(산업별 대출금) 잔액을 공개합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기업대출 잔액은 1875조7000억원으로 2018년(1121조3000억원) 대비 약 750조원 늘어났습니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는 이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기업의 직접금융(주식+회사채) 순증액이 지난해 상반기 10조7000억원인 데 반해 간접금융(대출+정부융자) 순증액은 41조원에 이릅니다. 기업이 직접금융(투자)보다 간접금융(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전문가들은 2010년대 정보기술(IT) 플랫폼 신화(네이버·카카오·쿠팡·배달의민족·당근마켓 등)를 만들어낸 한국 기업 생태계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자본시장을 더욱 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럽보다 미국을 따라가는 게 부국(富國)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국내 자본시장을 대변하는 한국 증시를 키워야 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외국인 주식 지분 취득 제한 규제 완화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 확대 △회사채 시장 활성화를 위한 금융시장 안정화기구 설치 등을 제언했습니다. 이를테면 외국인 주식 지분 취득 제한을 풀어서 한국이 MSCI 선진국 시장지수에 편입되면 440억달러(약 59조원·골드만삭스 추산)의 자금이 유입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