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10년 원자력 공동연구에 돌발악재…하필 美 원자력기술 산실에서

고재원 기자(ko.jaewon@mk.co.kr), 김성훈 기자(kokkiri@mk.co.kr), 김상준 기자(kim.sangjun@mk.co.kr)

입력 : 2025.03.18 19:34:24
세계 첫 상업용 원자로 가동
원자력발전 산실 아이다호硏
사용후핵연료 20분의 1 축소
‘파이로프로세싱’ 공동연구

한국 연구원 향후 美방문때
까다로운 절차 거쳐야할수도

수습나선 조셉 윤 美대사대리
“큰일 아냐…협력엔 영향없다”


아이다호 연구소


미국 정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CL)’에 추가한 까닭이 원자력 관련 기술 유출 시도로 좁혀지고 있다. 한미 첨단 기술 협력의 핵심인 원자력 분야에서 돌발 악재가 발생하면서 공동 연구개발(R&D)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8일 확인된 미국 에너지부(DOE)의 의회 제출용 감사보고서와 한미 당국자들 발언에 따르면 한국으로 원자력 기술 유출과 보안 이슈가 제기된 진원지는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다. 이 기관과 관련된 사람이 한국으로 기밀 소프트웨어를 갖고 출국하려다가 미국 정보기관에 적발됐다는 것이다.

미국 원자력 기술의 요람 격인 INL은 1949년 미국 북동부 아이다호주 아이다호폴스 지역 고지대 사막에 2310㎢ 규모로 설립됐다. 1955년 세계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를 가동해 전력을 공급하는 등 세계 원자력발전의 산 역사다. DOE 산하 17개 국립연구소 중 하나로 70개가 넘는 최신 시험용 원자로를 갖추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핵무기 관련 기술을 지원하고 방사성물질을 감지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미래의 원자로’로 불리는 소형모듈원자로(SMR)나 첨단 원자로 기술 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INL은 주요국 원자력 관련 연구기관·기업과 협업 중이다. 한국과는 △파이로프로세싱 △첨단 원자로 △사이버보안 △핵 비확산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특히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의 핵심인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핵연료 건식 재처리)과 관련한 미국 측 공동 연구 주체다. 파이로프로세싱 공동 연구를 위해서는 INL이 보유한 고방사능 실험 시설인 ‘핫셀’이 필수적인데, 이는 강력한 방사선을 내는 물질을 실험·가공하는 데 쓰이는 두꺼운 차폐 시설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이란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부피를 이론상 20분의 1로 줄이는 기술이다. 사용후핵연료를 전기분해해 세슘과 스트론튬 등 방사성원소를 별도로 처리하고 남은 플루토늄과 아메리슘 등 우라늄보다 질량이 무거운 초우라늄 원소를 소듐냉각고속로(SFR)에서 태워 재활용한다. 원자력발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 기술이 필수적이다. 한국과 미국은 10년 전부터 공동 연구에 착수했다. 양국 모두 사용후핵연료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였다.

이기복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은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은 미국도 개발이 간절하다”며 “세계 최고 원자력 기술을 지닌 한국과 협력해온 이유”라고 말했다.

현재 파이로프로세싱 공동 연구는 기술 개발 단계를 지나 실증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으로서는 한국과 미국 연구팀 모두 일정대로 실증을 마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다음달부터 민감국가 관련 조치가 시행될 경우 향후 연구 진행에 차질이 예상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이나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이 민감국가를 방문하거나 접촉할 때 사전 정보 브리핑, 사후 보고, 방첩활동 등의 내부적 제약을 받는다”며 “한국 연구원이나 출연연 관계자가 미국 연구소를 방문할 때도 신원 검증 절차 등에서 번거로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파이로프로세싱 관련 지식재산권을 한국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미국이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다만 학계에서는 파이로프로세싱의 경우 한국과 미국이 50대50으로 투자해 개발한 기술로 지식재산권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와의 특허권 분쟁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원전 수출 과정에서 원자로 설계 기술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발목을 잡기도 했다.

한편 학계 관계자는 “민감국가 선정은 미국의 행정적 실수라고 본다”며 “웨스팅하우스건을 해결하려고 민감국가로 지정했다가 사안이 잘 풀렸고, 해제를 했어야 하는데 정부가 바뀌면서 생긴 실수라고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 업계의 한 원로는 “40년 전에도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다가 풀었던 적이 있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당시 정부가 총력전으로 막았다”며 “사소한 이유일 수도 있고 심각한 사안일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국과 긴밀히 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셉 윤 주한 미국대사대리는 이날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초청 간담회에서 “에너지부 산하에 수출 민감 품목, 즉 반출이 금지된 품목을 다루는 연구소(INL)가 있는데 이곳에 작년 한 해에만 2000명 이상의 한국 학생과 연구원, 공무원이 방문했다”며 “한국에서 온 방문객이 너무 많다 보니 어떤 사건이 있었다. (한국이) 민감한 정보를 잘못 다뤘기 때문에 이 명단(SCL)에 오른 것”이라고 했다.

윤 대사대리는 다만 “민감국가라는 것은 에너지부 연구소에 국한된 조치”라며 “마치 큰일이 벌어진 것처럼 모든 것이 통제불능 상태가 됐지만, 이것은 절대로 ‘빅 딜(큰 문제)’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조치는 한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다”며 “인공지능(AI)이나 생명공학 협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임을 명확히 하고 싶다”고 파문 축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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