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알리 시계의 대공습
이승우
입력 : 2025.05.21 11:04:14
입력 : 2025.05.21 11:04:14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불과 얼마 전까지 인류에게 손목시계는 생활필수품이었다.
반지와 함께 양대 결혼 예물이었고 업무 및 개인 약속 시간을 지켜주는 소중한 도구였다.
별 치장할 게 없던 남성들의 유일 액세서리이기도 했다.
시·분·초침이 문자판 위에서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가 중심이었지만, 전자산업 발전에 따라 액정에 숫자가 표시되는 디지털 손목시계도 한 축을 차지한다.
하지만 위성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휴대전화의 등장은 '도구로서 시계'(tool watch) 역할을 무색하게 했고 스마트 워치의 출현은 손목시계의 퇴장을 가속했다.

초고가 명품시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예거 르쿨트르, 파텍 필립, 브레게, 블랑팡의 초고가 라인.[연합뉴스 자료 사진.재배포 DB 금지]
손목시계는 16세기에 처음 나왔는데 당시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남성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걸 남자답다고 여겼다 한다.
손목시계는 최첨단 기술의 상징이기도 했다.
전자산업 부상 이전 첨단 기계공업의 상징은 시계와 자동차였고, 특히 정밀기계의 정수는 손목시계였다.
스위스 시계는 손목시계의 대명사이자 장인정신의 상징으로 통했다.
직경 4㎝ 안팎의 좁은 공간 안에 수십 개의 눈곱만한 기계 부품을 조립해 한 치 오차 없이 작동하도록 한 스위스 시계 기술은 그 자체가 명품이었다.
다른 첨단산업처럼 손목시계 기술도 전쟁과 함께 발전했다.
정확한 시간 준수는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필수 요소여서다.
남자 주머니 속에서 손목 위로 시계가 올라온 것도 1차 대전 덕분이다.
폼 따위가 목숨보다 중요할까.
공군 파일럿, 해군 항해사, 잠수사 등에겐 임무 특색을 반영한 최상급 시계가 보급됐다.
파일럿들이 공습을 위한 이륙 직전 모두 모여 시계를 맞추는 장면을 담은 기록 사진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래서 1·2차 대전은 유럽과 미국 브랜드들의 시계 전쟁터였다.
명품 중 비교적 대중적인 오메가, 롤렉스 역시 군납 업체였다.
두 회사는 007 영화 시리즈 주인공인 해군 중령 제임스 본드의 손목 위에 자사 제품을 올리려 오랜 세월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대중화된 명품 시계 브랜드들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브라이틀링, 그랜드 세이코, 롤렉스, 오메가 [연합뉴스 자료사진.재배포 DB 금지]
손목시계는 이미지 마케팅과 스토리 텔링을 먹고사는 물건이다.
명품 브랜드들은 품질은 기본이고 고유의 '헤리티지'를 갖췄다.
속칭 '시계 덕후'로 불리는 마니아들은 명화나 골동품처럼 시계의 스토리에 끌린다고 한다.
예컨대 세계 최초 방수 시계, 세계 첫 파일럿 시계, 2차 대전 독일군 시계, 한국전 미군 시계 등이다.
달에 간 첫 시계도 매력적이다.
롤렉스는 품질도 좋고 여러 최초 기록도 많지만, 무엇보다 적극적 광고 마케팅을 통해 왕관 마크를 상류층, 모험가, 오피니언 리더의 이미지와 동격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스위스 시계의 영화도 한 일본 회사에 의해 풍비박산 났다.
1969년 크리스마스는 스위스 시계 업체들에 악몽으로 기억된다.
세이코가 세계 최초의 상용 쿼츠 시계 아스트론을 출시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윈도 운영체제나 아이폰의 등장처럼 판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쿼츠 시계 가격은 처음엔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량생산 체제가 착근해가면서 더 싸고 더 정확한 쿼츠 열풍이 휩쓸었고, 스위스 업체들은 줄도산했다.
마이크로 브랜드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유명 브랜드들조차 서로 합병하거나 거대 패션그룹 등에 인수되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쿼츠 파동과 스위스의 악몽 주역, 세이코
도쿄의 명물 세이코 본사 시계탑과 세이코 시계 [연합뉴스 자료 사진.재배포 DB 금지]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인가 '알리 시계' 바람이 불고 있다.
알리 시계가 뭔가 했더니, 중국 온라인 쇼핑몰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파는 중국산 저가 시계를 통칭하는 말이란다.
중국산 시계? 처음엔 우습게 봤다.
저질 모조품의 대명사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시계 덕후님들의 설명을 듣고 직접 알리에 들어가 시계를 봤더니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좋은 품질과 디자인의 중국산 시계가 넘친다.
가격 대비 마감이 괜찮고 핵심인 무브먼트는 일본산을 쓰니 사실 일제 시계나 다름없다.
이런 시계들이 4만~8만원대 가격을 형성하니 '직구' 버튼에 손가락이 절로 간다.
한국 시계 업체들과 비교해보자.
어차피 무브먼트를 수입해 쓰고 디자인에선 오마주란 미명 아래 명품 시계를 복제하는 건 피차일반이다.
그런데 가격 경쟁력은 우리가 한참 열세다.
시계 업체만 비상 걸린 게 아니다.
알리 시계는 유통 업체들에도 재앙의 전조일 수 있다.
이미 국내 온라인 쇼핑몰들은 알리와 테무의 공격적 마케팅에 휘청이는 중이다.
마치 한국전 기간 중공군의 대공세를 연상케 한다.
'알리 시계'는 단순히 중국 직구 시계의 유행을 뜻하는 것을 넘어 제조·유통 등 산업 전반에서 중국이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가능성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단어다.
중국은 오랜 기간 세계 생산기지 역할을 하면서 이젠 첨단 정보기술(IT) 기기 등에서도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했다.
여기에다 낮은 최저임금을 무기로 한 가격 경쟁력도 갖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비교 우위를 지녔는지 스스로 질문해본 적 있는가.
기업인과 노동자, 공무원들은 중국 대공세에 대응해 무엇을 혁신하고 있나.
영생을 누릴 듯했던 스위스 시계 업체들의 집단 몰락에서 교훈을 찾을 때다.
leslie@yna.co.kr(끝)
반지와 함께 양대 결혼 예물이었고 업무 및 개인 약속 시간을 지켜주는 소중한 도구였다.
별 치장할 게 없던 남성들의 유일 액세서리이기도 했다.
시·분·초침이 문자판 위에서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가 중심이었지만, 전자산업 발전에 따라 액정에 숫자가 표시되는 디지털 손목시계도 한 축을 차지한다.
하지만 위성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휴대전화의 등장은 '도구로서 시계'(tool watch) 역할을 무색하게 했고 스마트 워치의 출현은 손목시계의 퇴장을 가속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예거 르쿨트르, 파텍 필립, 브레게, 블랑팡의 초고가 라인.[연합뉴스 자료 사진.재배포 DB 금지]
손목시계는 16세기에 처음 나왔는데 당시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남성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걸 남자답다고 여겼다 한다.
손목시계는 최첨단 기술의 상징이기도 했다.
전자산업 부상 이전 첨단 기계공업의 상징은 시계와 자동차였고, 특히 정밀기계의 정수는 손목시계였다.
스위스 시계는 손목시계의 대명사이자 장인정신의 상징으로 통했다.
직경 4㎝ 안팎의 좁은 공간 안에 수십 개의 눈곱만한 기계 부품을 조립해 한 치 오차 없이 작동하도록 한 스위스 시계 기술은 그 자체가 명품이었다.
다른 첨단산업처럼 손목시계 기술도 전쟁과 함께 발전했다.
정확한 시간 준수는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필수 요소여서다.
남자 주머니 속에서 손목 위로 시계가 올라온 것도 1차 대전 덕분이다.
폼 따위가 목숨보다 중요할까.
공군 파일럿, 해군 항해사, 잠수사 등에겐 임무 특색을 반영한 최상급 시계가 보급됐다.
파일럿들이 공습을 위한 이륙 직전 모두 모여 시계를 맞추는 장면을 담은 기록 사진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래서 1·2차 대전은 유럽과 미국 브랜드들의 시계 전쟁터였다.
명품 중 비교적 대중적인 오메가, 롤렉스 역시 군납 업체였다.
두 회사는 007 영화 시리즈 주인공인 해군 중령 제임스 본드의 손목 위에 자사 제품을 올리려 오랜 세월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브라이틀링, 그랜드 세이코, 롤렉스, 오메가 [연합뉴스 자료사진.재배포 DB 금지]
손목시계는 이미지 마케팅과 스토리 텔링을 먹고사는 물건이다.
명품 브랜드들은 품질은 기본이고 고유의 '헤리티지'를 갖췄다.
속칭 '시계 덕후'로 불리는 마니아들은 명화나 골동품처럼 시계의 스토리에 끌린다고 한다.
예컨대 세계 최초 방수 시계, 세계 첫 파일럿 시계, 2차 대전 독일군 시계, 한국전 미군 시계 등이다.
달에 간 첫 시계도 매력적이다.
롤렉스는 품질도 좋고 여러 최초 기록도 많지만, 무엇보다 적극적 광고 마케팅을 통해 왕관 마크를 상류층, 모험가, 오피니언 리더의 이미지와 동격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스위스 시계의 영화도 한 일본 회사에 의해 풍비박산 났다.
1969년 크리스마스는 스위스 시계 업체들에 악몽으로 기억된다.
세이코가 세계 최초의 상용 쿼츠 시계 아스트론을 출시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윈도 운영체제나 아이폰의 등장처럼 판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쿼츠 시계 가격은 처음엔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량생산 체제가 착근해가면서 더 싸고 더 정확한 쿼츠 열풍이 휩쓸었고, 스위스 업체들은 줄도산했다.
마이크로 브랜드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유명 브랜드들조차 서로 합병하거나 거대 패션그룹 등에 인수되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도쿄의 명물 세이코 본사 시계탑과 세이코 시계 [연합뉴스 자료 사진.재배포 DB 금지]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인가 '알리 시계' 바람이 불고 있다.
알리 시계가 뭔가 했더니, 중국 온라인 쇼핑몰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파는 중국산 저가 시계를 통칭하는 말이란다.
중국산 시계? 처음엔 우습게 봤다.
저질 모조품의 대명사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시계 덕후님들의 설명을 듣고 직접 알리에 들어가 시계를 봤더니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좋은 품질과 디자인의 중국산 시계가 넘친다.
가격 대비 마감이 괜찮고 핵심인 무브먼트는 일본산을 쓰니 사실 일제 시계나 다름없다.
이런 시계들이 4만~8만원대 가격을 형성하니 '직구' 버튼에 손가락이 절로 간다.
한국 시계 업체들과 비교해보자.
어차피 무브먼트를 수입해 쓰고 디자인에선 오마주란 미명 아래 명품 시계를 복제하는 건 피차일반이다.
그런데 가격 경쟁력은 우리가 한참 열세다.
시계 업체만 비상 걸린 게 아니다.
알리 시계는 유통 업체들에도 재앙의 전조일 수 있다.
이미 국내 온라인 쇼핑몰들은 알리와 테무의 공격적 마케팅에 휘청이는 중이다.
마치 한국전 기간 중공군의 대공세를 연상케 한다.
'알리 시계'는 단순히 중국 직구 시계의 유행을 뜻하는 것을 넘어 제조·유통 등 산업 전반에서 중국이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가능성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단어다.
중국은 오랜 기간 세계 생산기지 역할을 하면서 이젠 첨단 정보기술(IT) 기기 등에서도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했다.
여기에다 낮은 최저임금을 무기로 한 가격 경쟁력도 갖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비교 우위를 지녔는지 스스로 질문해본 적 있는가.
기업인과 노동자, 공무원들은 중국 대공세에 대응해 무엇을 혁신하고 있나.
영생을 누릴 듯했던 스위스 시계 업체들의 집단 몰락에서 교훈을 찾을 때다.
leslie@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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