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위에 새겨진 'V자 지혜'…남해 지족해협 죽방렴
500년 전통어업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폭염 속 조업 일시 중단했지만 어민들 기대
박정헌
입력 : 2025.07.15 15:14:19
입력 : 2025.07.15 15:14:19

[촬영 박정헌]
(남해=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평생 이곳에서 고기를 잡으며 자식들을 키웠어요.
남들은 힘들지 않냐고 하지만 이 정도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어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니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아 어깨도 펴지고 보람도 있습니다." 15일 경남 남해군 삼동면 지족해협에서 만난 김해경(63) 죽방렴보존회장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한려수도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병풍처럼 둘러싼 지족해협에는 붉은색 아치교 하나가 지상과 섬을 잇고 있다.
다리 아래로 거센 물살이 굽이치는 좁은 바다 물목에 마치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친 듯 V자 형상으로 촘촘히 박힌 대나무 발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500년 넘게 이어져 온 남해군의 전통 어업 방식인 죽방렴(竹防廉) 현장이다.
어업인들은 이날 새벽 조업을 일찌감치 마쳐 죽방렴 근처에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4∼12월이면 보통 물때를 맞춰 현장에 나온 어민들이 이때 그물을 거둬들이는 식으로 조업이 이뤄진다.
김 회장은 "최근 날이 더워 수온이 높아지며 멸치가 거의 잡히지 않아 열흘 넘게 조업을 중단했다"며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시기에 맞춰 다시 일을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근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죽방렴을 최종 등재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이곳은, 고즈넉한 풍경 속에 어민들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촬영 박정헌]
죽방렴은 이름 그대로 대나무(竹)로 막아서(防) 물고기를 가두는(廉) 원시 어업이다.
수면 위로 솟아오른 수많은 나무 기둥 사이를 엮은 대나무 발들이 거대한 V자를 이룬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며 거세게 흐르는 물살은 투박한 대나무 말뚝들 사이를 지난다.
이 강한 물결 속에 자연스럽게 밀려 들어온 물고기들은 V자 형태를 따라 이동하다가 끝부분에 설치된 둥근 통발에 갇힌다.
대나무와 참나무 등 순수 자연 소재만을 사용하고, 그물이나 기계를 쓰지 않아 바다 생태계에 인위적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
이처럼 환경 파괴 없는 '지속 가능한 어업'이라는 점이 이번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의 핵심 이유였다.
지족해협에는 현재 총 23개의 죽방렴이 있다.
이곳에서 잡히는 멸치나 전어 등 어류는 비늘 손상이 적고 맛이 담백해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어민들에게도 단순한 생계를 넘어선 자부심이자 살아 숨 쉬는 소중한 유산이다.
군은 죽방렴을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견인할 새로운 핵심 성장 동력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향후 보존·전승사업 강화, 생태관광 상품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김 회장은 "남해에서는 2∼3대에 걸쳐 죽방렴 어업을 이어가는 어민들도 있다"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유산을 잘 보전해서 후세까지 이어지도록 노력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home1223@yna.co.kr(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