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멕시코, 중국, 철강, 알루미늄 등 특정 국가와 특정 품목을 대상으로 전개돼 왔던 ‘트럼프표 관세 정책’의 전선이 무한히 확장될 기세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호관세’에 부과결정이 담긴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관세뿐만 아니라 환율과 비관세 장벽 등 상호 호혜적이지 않은 모든 요인까지 조사 대상으로 삼으면서 “미국에 성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 트집을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보편관세 언급은 줄어...상호관세 부르짓는 이유는
취임 이후 보편관세를 부르짖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들어 상호관세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보편관세’는 “관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공언해 온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공정하고 상호적인 계획’이라는 제목의 각서에 서명한 뒤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 조치를 통해 미국 경제 관련 부처들은 미국을 상대로 부당한 관세와 상관행을 적용하는 국가들 사례를 조사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개별 협상에 나설 전망이다.
대선 직후인 11월 25일 당선인 신분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10%, 맥시코·캐나다에 25% 보편관세 부과를 발표하며 공약을 현실화할 기세였다.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한 보편관세 부과는 한 달 유예됐지만 중국에 대한 보편관세는 시행까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EU)과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를 콕 찝어 보편관세 부과 대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지난 9일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상호관세는 상대국 수준에 맞춰 관세율을 정하는 조치다. 90여년 전 대공황 시기에 보호무역 강화를 두고 전세계적인 회의론이 부상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던 방안이다. 상호 관세를 쌍방향으로 인하해 국가별 관세격차를 축소하고, 자유무역 확대를 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제도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완전히 거꾸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편관세보다 상호관세에 집중하는 것은 각국으로부터 원하는 협상 조건을 이끌어 내는데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편관세는 전세계, 전품목을 대상으로 동일한 관세율을 부과하기 때문에 각국이 우회 수출 통로를 모색하거나 양자회담을 통한 협상 가능성이 낮은 형태다.
반면 상호관세는 양자 협상의 여지를 열어둔 방식으로 평가된다. 전품목에 동일한 관세율이 부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국 입장에서는 특정 수입 품목에 대한 미국의 관세인상 조치를 협상을 통해 막으려는 유인이 커진다.
노동길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구체적인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관세율을 타겟할 경우 멕시코와 한국 등 자유무역협정(FTA) 국가들에 관세 예봉을 피할 기회를 준다”며 “반면 미국을 대상으로 차별적으로 높은 관세를 부과해 본국 산업을 보호했던 나라들에는 약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관세 높아지면 한국車 반사이익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로 한국이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도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EU가 모든 수입차에 10%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 미국은 수입차에 2.5%의 관세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상호관세의 개념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향후 미국의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율은 10%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11일 경기도 평택항 인근에 수출용 차들이 세워져 있다. 2025.2.11 [사진 = 연합뉴스]
이 경우 나머지 자동차 산업의 주요국으로 미국과 무관세로 교역 중인 일본과 한국은 상호관세로부터 상대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구조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EU가 연간 약 80만대, 403억 유로의 차량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데, 관세가 10%로 상향될 경우 차량당 300~400만원의 가격 인상 요인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유럽산 차량이 비싸지면 한국산 차량은 상대적으로 저렴해보이는 효과가 난다.
유지웅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자동차 상호관세 부과 지역은 EU, 중국에 해당되며 한국산의 경우 이미 상호 부관세, 상대적으로 반사 수혜가 가능한 구조”라며 “현대차그룹이 철강소재·배터리 부문 모두 미국 내 수직계열화를 이뤄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볼만 하다”고 평가했다.
韓 비관세장벽 해소 부담은 커져
다만 한국 정부로서는 부담이 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를 무기로 각국의 비관세 무역장벽을 문제삼으면서 우리도 미국과의 무역시스템 전반을 되돌아봐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전쟁의 전선이 특정 산업과 품목에 국한되지 않고, 수출입 정책과 환율 정책, 규제 법안 등 전방위로 확대됐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각서에는 무역 상대국이 미국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뿐만이 아니라 부가가치세 등 세금과 보조금, 환율, 불공정 관행 등 비관세 조치들을 폭넓게 검토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는 각서에 “수년간 미국은 우방국과 적국 모두의 무역 파트너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왔다”며 “우리 노동자와 산업은 불공정 관행과 해외시장 접근 제한의 피해를 입어왔다. 이런 상황은 지속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무역 파트너와의 ‘비호혜적’ 무역에 대응하기 위해 상호 관세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미국 기업의 한국시장 진출에 장애가 돼 온 한국의 각종 정책들을 폐기하라는 주장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것이 거대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의 반경쟁행위를 차단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플랫폼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법)’이다. 미국상공회의소 등은 이 법이 중국 기업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애플과 구글, 아마존, 메타 등 미국 기업을 규제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RT)이 발간한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 표지
향후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서 관세·통상 압박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날 미국은 비관세 장벽 중 환율정책도 살펴보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한국은 2023년 관찰대상국 리스트에 빠졌지만 지난해 11월 1년 만에 다시 지정됐다.
환율조작국 지정시 대미 교역은 타격을 입게 된다. 고율의 관세 부과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가신용등급와 외국인의 국내 투자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평가다.
한국의 농축산 시장 추가 개방도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무역대표부(USRT)은 매년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를 발간하는데, 한국의 30개월 미만 소고기 수입 월령제한 조치와 블루베리, 체리, 사과 등에 농산물에 대한 시장진입 제한 조치 등을 문제 삼아 왔다.
투자시장 개방에 대한 요구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법률 시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무역장벽보고서에서 미국 무역당국은 외국 로펌의 소유지분을 49%로 제한하고, 업무 범위 제한을 두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육류도매업과 지상파방송, 전력, 간행물 발간 등과 관련된 투자 제한도 문제 삼았다.
통상전문가들은 4월 상호관세 부과 전까지 미국이 원하는 카드를 맞추기 위한 각국의 협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한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미국 정부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역 압박을 하면서도 각국과 양자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긴장 수위를 낮춰간 바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개별 산업과 개별 품목의 이익 균형을 맞춘다는 게 어려울 수 있고, 통상당국이 생각하는 이익 균형만으로는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며 “국가별로 얻어내야 하는게 있고, 양보해야할 것이 있는 상황에서 외교, 안보 등과 연계된 범부처 협상 패키지가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