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사구의 재발견] ④ 모래언덕과 한집살이…미로 정원 같은 제주 바닷가 마을

평대리 마을, 사구를 방벽 삼아 삶의 터전 일궈…'반농반어' 삶의 기반한동리 마을, '단지모살' 숲으로 가꿔…모래바람 막고 발전 토대 삼아
고성식

입력 : 2025.07.13 08:00:04
[※ 편집자주 = 해안사구는 바닷가와 그 주변 육상에 있는 모래 언덕 등 모래땅입니다.

해안사구는 해수욕장 백사장에 모래를 공급하는 모래 저장고이며, 거센 파도의 충격을 흡수하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나아가 기후 위기를 막아 줄 '블루카본'의 저장고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 열풍 속에 제주를 비롯한 국내 많은 사구가 옛 모습과 기능을 잃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제주의 해안사구를 중심으로 그간 크게 쓰임이 없는 모래땅으로만 여겨진 해안사구의 가치를 소개하고, 보전 방안을 찾아보는 기사를 10회에 걸쳐 송고합니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전경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평대 해변(쉰모살)에서 바라본 평대 마을.2025.7.13.jihopark@yna.co.kr (끝)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해안사구는 백사장 등에서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여 형성된 지형이다.

제주어로 모래바람을 뜻하는 '모살비'는 제주 해안 곳곳에 모래 언덕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형성된 모래언덕 가운데 하나인 제주도 북동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해안사구는 과거 육상 안쪽 5㎞까지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섬으로 몰아치는 바람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해안사구의 모래바람은 주민들에게 불편함과 시련을 주기도 했지만, 해안사구는 거센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방패막이자 바다 근처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든 토양이기도 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게 해안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연안 자원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해안사구는 주민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인 동시에 적응과 활용의 대상이었다.

사구 마을의 주민들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주거와 농업에 사구를 적극 활용했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전경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평대 마을 전경.풀과 나무로 푸르게 보이는 곳이 모래언덕(해안사구)이다.2025.7.13.jihopark@yna.co.kr (끝)

◇ 삶의 터전 된 모래언덕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는 과거부터 해안사구에 기대 살아온 마을이다.

바닷가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사구 지대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남쪽 안쪽으로는 바람 피해가 적고 비옥한 평지가 있다.

모래언덕은 염분이 섞인 해풍을 막아주는 방벽이 됐고, 안쪽의 평탄한 지형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다.

이 평탄한 지형을 제주에서는 '벵디'라고 부른다.

평대리에서는 모래언덕 사이에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고, 그 언덕에는 풀과 나무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어 하늘에서 보면 미로 정원 같은 독특한 패턴을 이룬다.

주민 고홍기(59) 씨는 "과거 사람들이 평대 해안사구에 집을 지은 이유는 모래언덕이 바람을 막아줘 집 안으로 모래가 덜 들어왔기 때문"이라며 "집이 해안사구 안에 있었기에 사구를 파헤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대부분 보존돼 있다"고 말했다.

부영웅(82) 씨는 "옛날엔 바람을 피하려고 지형이 움푹 파인 곳을 골라 집을 지었다"며 "지금도 모래언덕 옆에 집을 짓고 있지만 건축 기술이 좋아져 낮은 지대를 메워 현대식 집을 짓고 산다"고 전했다.

사구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생활을 해왔다.

제주시 평대 마을 안의 해안사구 언덕
[촬영 고성식]

평대 해안사구는 평대해변인 '쉰모살'에서 날아든 모래로 형성됐다.

주민들은 사구 모래언덕에 '불림모살', '진모살', '복동모살', '수리앗길' 등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벵뒤공원길 주변은 과거 아이들이 모래 동굴을 파며 놀던 놀이터였고, 어른들은 고구마를 널어 말리는 장소로 활용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사구의 모래밭에서 당근 재배가 본격화됐다.

물 빠짐이 좋은 모래밭에서 재배한 이른바 구좌 당근은 타지역 당근보다 인기가 좋아 읍 전역으로 재배지가 급격히 확장됐다.

사구는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공간의 역할도 했다.

평대리에 사는 한 노인은 "천연두, 그런 걸로 인해서 잘못되면 어린아이들이 많이 숨지곤 했는데, 거기 모래 동산에 가서 시신을 많이 안장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2년 12월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해안사구에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 및 영아 유골 12구와 성인 유골 3구가 발견됐다.

평대리 마을에는 '설운 아기 묻은 모래 동산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말도 전해진다.

향토사학자인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은 "과거 제주의 많은 마을에 전염병에 걸려 숨진 어린아이들을 마을을 경계지 인근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며 "매장 위치는 마을 경계로 비슷하지만, 각 마을 자연환경에 따라 매장지가 다르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조선 시대 유교적 전통에 따라 가까운 곳에 죽은 가족을 모실 수 있도록 마을 인근에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 4.3 당시 사구 속에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만 주민들 사이에서 사구의 생태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아직 낮은 편이다.

고홍기 씨는 "예전 해안도로를 조성할 당시에도 해안선 방어 유적인 환해장성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고, 사구는 신경 쓰지 않았다"며 "당시에는 해안사구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들어 해안사구의 가치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은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환경부는 평대리를 생태관광마을로 지정했고, 주민들은 제주자연의벗과 함께 해안사구 모니터링 및 복원 활동에 나섰다.

해안사구와 마을을 연계한 생태관광을 통해 마을 발전과 사구 보존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주민들의 목표다.

제주 한동리 단지모살 해안사구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단지모살.해변에서 떨어진 육지에 있지만 마치 모래 해변과 같은 모습이다.2025.7.13.jihopark@yna.co.kr (끝)

◇ 모래언덕에 나무 심어 마을 공동자원으로 활용 평대리의 이웃 마을인 한동리에도 독특한 해안사구 지형이 있다.

'단지모살'로 불리는 이 사구는 해안에서 1㎞ 이상 떨어진 모래언덕으로, 월정리 해변의 모래가 날려와 쌓여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모살에서 '단지'의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모살'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다.

이 해안사구는 월정 해안사구의 일부로, 해변의 모래가 먼 거리의 육상까지 날려 와 투물러스 지형에 쌓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투물러스'는 용암이 흐르던 중 뜨겁고 점성이 높은 용암이나 가스가 상승하자 표층이 위로 부풀어 오른 채 굳은 둥근 언덕 모양의 지형을 뜻한다.

해안사구는 보통 사빈(백사장)에서 바로 육상 쪽으로 전사구, 배후사구로 이어진 형태를 보이지만 한동리의 경우 사빈과 전사구는 없고, 배후사구인 단지모살만 남아 있다.

오랜 기간 주변에 농경지와 도로,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해안과 단절돼 전사구의 흔적이 사라지고 배후사구만 섬처럼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모래언덕 위 모래땅에는 염생식물인 사철쑥, 애기달맞이꽃, 갯메꽃 등 자라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단지모살
[촬영 고성식]



제주 한동리 단지모살 해안사구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단지모살.해변에서 떨어진 육지에 있지만 마치 모래 해변과 같은 모습이다.2025.7.13.jihopark@yna.co.kr

단지모살에는 한동리 주민들의 모래 지형에 대한 극복과 활용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동리 마을은 단지모살에서 모래가 날아와 주민들의 농사일과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불편이 컸고, 일제 강점기까진 우물이 적어 마실 물이 풍족하지 않았다.

김평선 제주차롱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의 '한동 단지모살 숲 조성, 공동자원의 창출과 변화'에 따르면 한동리 주민들은 1930년대 조선사방사업령에 의한 지원금을 받아 단지모살에 조림사업을 했고, 이 사업을 하면서 받은 주민들의 노임 절반을 걷어 우물을 새로 팠다.

주민들은 모래땅에 나무를 심는 일이 당시 기술로 쉽지 않았지만, 나무뿌리에 흙과 콩 비지를 섞어 심으면서 나무 생존율을 높여 나가며 사방사업을 했다.

또 노임을 모아 마침내 1935년 깊이 22m의 우물을 조성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깊었던 우물로 추정된다.

한동 단지모살에 핀 갯메꽃
[촬영 고성식]

공동으로 조성한 단지모살 숲은 제주4·3 당시인 1948년 군경의 토벌작전 와중에 황폐화했지만, 1950년대 들어 단지모살 숲을 다시 조성하고 조림사업의 노임을 모아 한동초등학교도 건립하자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졌다.

단지모살 해안사구는 현대에 들어서도 마을 발전을 위한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9년 제주용암해수산업단지가 단지모살 주변 해안사구인 마을 땅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해안사구 일부를 제주도에 매각했다.

이때 주민들은 토지 매각으로 발생한 수익금을 인구 감소로 소규모 학교가 된 한동초등학교를 살리는 데 썼다.

이주민 공동주택 건설 용지를 매입해 공동주택을 지어 이주민 재학생 가정을 위한 보금자리로 제공했다.

김평선 제주차롱 사회적협동조합 이사는 "한동리 사례는 마을 공동자산인 해안사구를 그때 상황에 맞게 잘 활용하고 마을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라고 말했다.

단지모살은 1942년 구좌면 중앙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장소로도 사용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42년 제주도 구좌면 중앙학교 '제20회 졸업기념' 사진첩에는 단지모살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학생들이 단지모살 사구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장면
출처 = 1942년 제주도 구좌면 중앙학교 제20회 졸업기념 사진첩 [제주환경운동연합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평대리와 한동리 외에도 해안사구가 있는 마을 어느 곳이나 해안사구와 얽힌 많은 이야기가 있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웃동네'의 모래 동산인 연대봉은 산처럼 우뚝 서 있고 숲이 우겨져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구좌읍에는 모래라는 뜻의 제주어 모살이란 표현이 들어간 '모살가름', '앞모살동' 등의 마을을 비롯해 곳곳의 지명에 모살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고, 제주 토속 신앙인 굿 본풀이 일부에도 모래 지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수남 제주자연의벗 사무처장은 "구좌읍을 비롯해 섬 곳곳 해안사구에 많은 사연이 있다"며 "해안사구에 대한 인문·사회·문화적 접근과 연구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라며 아쉬워 했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 연대봉
[촬영 고성식]

(이 기사는 제주환경공익기금위원회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koss@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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