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0년째 ‘낙제’ 평가에도 또 예산 1조 투입…이해관계 얽힌 ‘좀비 기금’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입력 : 2025.07.30 18:39:58 I 수정 : 2025.07.30 19:23:24
농어가목돈마련 7회 연속 부정평가
양성평등기금·청소년기금 성과 부족
정부 예산 출연금으로 연명
“설치 목적 사라지면 정비해야”


20년 넘게 실적 부진 평가를 받아온 이른바 기금들이 올해도 정부 예산을 받아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에만 이들 기금에 1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지만, 실질적인 정비는 이뤄지지 않았다. 각 부처와 이해관계가 얽힌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매년 수십조 원의 재정적자를 내 정부 재정 운용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30일 매일경제가 2004년부터 2025년까지 기획재정부 산하 기금운용평가단의 기금존치평가보고서를 전수 분석한 결과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 지역신문발전기금, 양성평등기금(옛 여성발전기금), 청소년육성기금 등 최소 4개 기금이 20년째 ‘낙제’ 평가를 받고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통상 개별 기금은 3년마다 운용과 존치 여부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이 가운데 이들 기금은 대부분 평가에서 ‘폐지’나 ‘조건부 존치’, 다른 기금과의 ‘통합’ 등을 권고받은 상태다.

정부 기금은 일반 예산과 달리 특정 목적을 위해 법적 근거로 조성된 재원이다. 건강보험기금이나 국민연금기금처럼 보험료나 민간 부담금 등으로 조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기금은 정부가 예산으로 매년 직접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기금이 국회에 보고되고 심의를 받긴 하지만, 일반 예산보다 감시가 느슨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사업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이다. 1985년 농어민의 재산 형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범한 해당 기금은 현재 자체 재원이 전무하다. 해마다 정부 예산과 한국은행 출연금으로만 채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백억 원이 들어가고 있으며, 올해만 해도 511억원이 투입됐다. 올해 기금운용평가단은 “농어민 저축 장려와 재산 형성 효과를 판단한 근거가 부족하고 기금의 중장기 운용 계획이 없다”며 폐지를 권고했다. 하지만 이 같은 평가는 새롭지 않다. 2004년 첫 평가에서도 이미 폐지 필요성이 언급됐고, 7번의 평가에서 단 한 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지역신문발전기금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2004년 지역신문 지원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후 유사 목적의 신문발전기금이 따로 만들어지면서 사업 중복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다. 평가단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폐지하고 지역신문 관련 사업은 언론진흥기금의 세부 사업으로 이관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조건부 존치를 권고했다.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기금과 청소년육성기금도 반복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양성평등기금은 복권기금에서 매년 예산의 96% 이상을 끌어다 쓰고 있으며, 자체 수입이나 여유 자금 운영 능력은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다. 2019년에는 존치 판정을 받았지만, 당시에도 “자체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여유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해 장기 계획에 따라 사업의 지속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치 목적 달성에 큰 제한이 있다”고 지적됐다. 올해 평가에서도 “복권기금 전입금 외에 다른 재원 없이 운용되고 있으며, 사업 관리 체계와 기금 운용 전략 모두 미흡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다년간의 평가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 문제지만, 기금 사업의 관리와 재원 다양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미흡하다”고 강하게 비판받았다.

청소년육성기금 역시 2007년과 2019년을 제외한 모든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았다. 자체수입 비율이 7.1%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 정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 사업을 반복하는 데 그친다는 평가다. 평가단은 “이러한 지적은 다년간 꾸준히 이뤄졌으나 개선되지 않았다”며 사업 확대와 수입 다양화를 주문했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적극적인 조치는 쉽지 않다는 견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평가단의 보고서는 권고에 불과해 법적 강제력이 없고, 실제 기금 폐지나 통합 여부는 주무 부처의 의지에 달려 있다”며 “대부분 기금이 관련 이해관계자들에 의해 사업이 고정돼 있고, 부처들도 기금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개편이 지연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존치평가는 형식적으로만 이뤄지고 기금의 존속 여부는 사업 성과나 정책적 필요성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이해관계와 관료적 관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낙제’ 등급을 반복적으로 받아온 기금들이 수십 년째 개선 없이 예산을 받고 있는 현실은 새 정부의 ‘성과 중심 재정 운용’ 기조와도 충돌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기금 제도 자체는 필요한 장치라고 인정하면서도 현재 방식은 효율을 떨어뜨리고 책임성이 결여된 ‘그림자 재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금운용 평가단을 역임했던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금은 예산보다 국회의 통제를 덜 받다 보니 정부가 자의적으로 운용할 가능성이 높고, 특정 부처나 이해집단의 재량으로 활용될 수 있다”며 “설치 목적이 퇴색된 기금은 과감히 통합하거나 폐지하고, 남겨야 할 기금은 사업 관리 체계를 고도화해 투명성과 효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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