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 넘치는데 공장 마구 짓더니”…석유·화학 공장 줄폐업 위기, 정부 대책은

유준호 기자(yjunho@mk.co.kr),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한재범 기자(jbhan@mk.co.kr)

입력 : 2024.12.24 10:02:44
석유화학 글로벌 공급과잉
작년 4400만→2028년 6100만t

석유화학 ‘시장실패’ 대책으로
정부 또다시 “기업자율 재편”

전문가 “대규모 장치산업은
기업 차원 사업매각 쉽지않아
구조조정 과정 정부역할 중요”




정부가 23일 산업 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하자 석유화학 업계는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정부가 산업에 직접 ‘메스’를 들이대 구조조정을 하기보다는 사업 재편에 대한 기업들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외곽에서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석유화학 기업들이 스스로 사업을 재편하면 고용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후속 대책에 나서겠다는 내용이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에서 이미 ‘시장 실패’가 발생했는데 시장 실패를 바로잡을 정부가 그 역할을 회피하고 시장에 미룬 셈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석유화학 설비는 2010년 대비 70% 늘었다. 같은 기간 일본은 15%, 서유럽은 9% 석유화학 설비를 줄인 것과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다. 더구나 유럽은 바이오와 특수가스, 일본은 전자소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한 반면 한국은 나프타분해설비(NCC)로 대표되는 범용 제품 생산에 집중했다.

게다가 2018년부터 중국이 석유화학 자급을 목표로 대규모 증설에 나섰고, 중동마저 탈석유 시대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석유화학 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4400만t이었던 글로벌 공급 과잉 규모는 2028년 6100만t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한국 전체 석유화학 설비의 5배에 달하는 물량이다.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저가 제품 밀어내기는 이미 현실화됐을 뿐 아니라 기술 자립도 역시 굉장히 높아진 만큼 전방위적인 중국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며 “결국 스페셜티가 중심이 된 석유화학 산업의 재편이 얼마나 빠르게 완성되느냐에 존폐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선제적이고 발 빠른 구조조정과 정책 지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을 기대했다. 중국과 중동에서 수입되는 저가 범용 제품의 범람은 기업의 자발적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상준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근본적으로 범용 제품 과잉 생산이 끝나지 않으면 석유화학 업계의 악순환 고리가 쉽게 끊기지 않을 것”이라며 “과거에도 석유화학 업계는 상승과 하락 사이클을 탔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극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만큼 결국 구조조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대규모 장치 산업의 특성상 기업 스스로 특정 사업을 떼어 매각하거나 사업부, 공장 단위 매각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시장 자율의 구조조정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 자율성’이라는 미명하에 구조조정 결단을 업계에 미뤘다. 기업들이 스스로 제3의 기관에서 컨설팅을 받아오면 그 결과를 보고 추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사업 재편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국내에서 석화 설비를 얼마나 줄여야 할지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국내 정치 상황에 더해 자동차와 반도체, 해운 등 ‘정부 주도 빅딜 실패’의 트라우마가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정부가 이날 내놓은 정책은 현행 3년 제한의 지주회사 규제 유예 특례 기간을 5년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매수자가 수익이 발생된 이후 지분 규제를 이행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한 조치다. 합작법인 설립, 신사업을 위한 인수·합병(M&A) 등을 추진할 경우 기업결합심사가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공정거래위원회의 사전 컨설팅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시장 자율의 구조조정을 돕겠다는 것일 뿐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방안이 아니다.

석유화학 산업을 치유할 근본적인 처방은 제쳐놓고 부수적인 역할만 자임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 재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고용 불안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 요건을 완화한다는 것이다.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면 주된 산업과 연관된 협력업체에 고용유지지원금이 지급된다. 산업 재편을 이행하는 기업들은 금융채무 상환 또는 투자 재원 확보 목적으로 자산 매각 시 과세 이연 기간이 연장되는 혜택도 받는다.

정부가 석유화학 업계의 유동성 해갈을 위해 총 3조원 규모의 정책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는데, 이 또한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납사와 납사 제조용 원유에 대한 무관세 기간을 1년 연장하고, 공업 원료용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석유수입부과금 환급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년 상반기까지 투자 로드맵을 수립해 주력 산업 연계 고부가 소재 기술과 탄소 감축 핵심 기술, 글로벌 환경 규제 대응 기술 등 3대 분야의 연구개발(R&D)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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