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 "내가 원할 때까지 사과 전화를 하라"
'고객의 분노' 온몸으로 받는 콜센터 상담사들"만성우울장애·공황장애·과호흡 발작 등 시달려""고객들, 상담사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겨"
김유진
입력 : 2025.03.20 05:50:00
입력 : 2025.03.20 05:50:00

[영화 '다음 소희' 캡처.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유진 인턴기자 = "고객들은 콜센터 상담사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깁니다.
저는 회사 규정대로 안내했을 뿐인데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본인 기분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시더군요.
그날 이후로 저는 '만성우울장애'라는 정신 질환을 진단받았습니다."(자동차업체 고객센터 상담사 A씨) "고객으로부터 민원이 들어오면 관리자가 모든 직원이 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상담사를 질책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많이 겪었고 목격했습니다.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조금이라도 의견을 내비치면 추후에 성과급과 직결되는 QA점수 등으로 불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금융권 고객센터 상담사 이하나 씨) 실화를 바탕으로 콜센터 교육생의 고통을 고발한 영화 '다음 소희'가 개봉한 지 2년.
변화는 있었을까.
지난 4일 공공운수노조 여성위원회·공공운수노조 콜센터사업장 연석회의·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기자회견을 열고 "감정노동자 보호법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현장에서 발생하는 관리자의 괴롭힘과 폭력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LG헬로비전의 콜센터 업무를 담당하는 자회사 CV파트너스의 관리자가 실적이 안 좋다며 상담사에게 소금을 뿌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또한 상담사들은 상당한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려 방광염, 성대결절, 정신 질환 등 심각한 질환에 노출되고 있지만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한 병가나 연차 휴가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밝혔다.
'사랑하는 고객님'을 최전선에서 상대하는 콜센터 상담사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유튜브 '씨리얼' 캡처.재판매 및 DB 금지]
◇ "너희는 우리의 짜증을 들어도 된다" 2019년부터 모 금융권 회사의 위탁업체인 효성ITX 소속 상담사로 일하는 이하나(42) 씨는 지난 18일 전화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부터 고객의 폭언은 상담사가 감당해야 할 당연한 일이 돼 버렸다"며 "'너희는 우리의 짜증을 들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고객들이 많다"고 밝혔다.
이씨는 "고객들이 '왜 이렇게 앱을 짜증나게 만들었냐'는 등의 발언을 하신다"며 "도움을 드릴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전화를 끊을 수도 없고 바로 해결할 수도 없는지라 계속 사과만 드려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많이 힘들고 괴롭다"고 털어놨다.
모 자동차회사 고객센터 상담사 A(37)씨는 경력 13년의 베테랑 상담사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만성우울장애를 진단받고 산업재해가 인정됐다.
A씨는 "2022년 6월 한 고객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굉장히 힘들게 할 것이다', '내가 원할 때까지 사과 전화를 하라'며 장시간 통화를 지속했다"며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냥 상담 중 고객의 기분이 불쾌해졌다는 이유로 시작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료들 역시 공황장애, 우울증 등을 앓고 있다"며 "한 상담사는 출근길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과호흡 발작이 온 적이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상담사들은 이러한 고통에도 회사의 보호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갑자기 개인사정이 생기거나 몸이 아파도 연차를 쓸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거나, 일방적으로 만근 수당을 3만원 깎은 후 급여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는 일 등이 벌어진다"고 밝혔다.
A씨는 고객과의 상담 후 정신적 부담을 느껴 파트장과 센터장에 면담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폭언과 방관뿐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 2023년 7월 26일 오전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한인임 정책연구소 이음 이사장이 2023년 콜센터 노동자 건강권 실태조사 결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민주노총이 1천280명의 콜센터 상담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 콜센터 노동자 건강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아파서 병가나 연차 휴가를 하루도 쓰지 못했다고 답변한 비율은 28.5%에 달했다.
그 이유로는 '관리자에게 밉보일까봐'가 26.7%로 가장 많았고, '회사에서 못 쓰게 해서'도 13.1%였다.
또 상담사 70%는 업무로 인한 팔과 허리 통증, 만성피로 등을 호소했다.
이는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 호소율보다 적게는 3배 많게는 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방광염, 성대결절, 정신질환 등은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에 비해 10배에서 수십배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울, 불안장애 등 정신과 질환을 경험한 자는 31%로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인 2.8%보다 약 11% 높게 측정됐다.
상담사들이 가장 많이 겪는 직장 내 괴롭힘(16.4%)은 '고객 컴플레인에 대한 무리한 반응'(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평가하거나 고객에게 직접 사과하라는 등)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지난 4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여성위원회 등이 여성의날을 앞두고 연 '콜센터 현장 내 괴롭힘 고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고용노동부와 콜센터 운영 회사들이 책임있게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2025.3.19 seephoto@yna.co.kr
◇ "1천명 입사하면 937명 퇴사…열악한 근무환경" A씨는 "상담 전 '지금 연결해 드리는 상담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니 폭언 등을 하지 말아달라'는 안내가 나오지만 고객 입장에서 상담사는 내 가족이 아니다.
그저 남일 뿐이고, 또 상담사가 전화를 끊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쉽게 폭언과 욕설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객 응대 근로자 건강보호 매뉴얼'에 따르면 고객이 무리한 요구나 심한 욕설을 할 경우 상담원이 몇 차례 주의를 주고 전화를 먼저 종료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상담사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이씨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에 따라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데, 온라인 교육이고 상담사들이 업무를 하는 중에 이뤄지고 있다"며 "상담사들은 자신이 감정노동자 보호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씨는 "대부분의 콜센터들이 교육생들을 최대한 짧게 교육하고 빨리 실무에 투입하고 있다"며 "그런 신입 상담사들은 업무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고객들의 폭언에 더 쉽게 노출돼 있다"고 전했다.

[영화 '다음 소희' 캡처.재판매 및 DB 금지]
하은성 샛별노무사사무소 노무사는 '교육생'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보통 채용 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없으니 직무교육 같은 신입사원 교육을 하게 된다"며 "여기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는 사람은 회사에 소속된 사원이지 교육생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문제가 '교육의 외주화'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콜센터 교육생의 교육을 외부업체에 위탁해놓고 교육받는 기간은 근로자가 아니라고 구분, 교육생들을 '구직 중인 자'로 격하시켜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또 근로자의 직무 훈련 비용의 일부를 고용보험기금으로 지원하는 '사업주 직업능력개발 훈련지원금'이 3개월까지만 지원되는 것도 '단기 고용'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하 노무사는 "회사에선 3개월까지는 직원이 못 나가게 붙잡더라도 4개월 차부터는 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며 "똑같은 사람을 계속 쓰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지원금을 계속해서 받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제공한 지난해 기준 '콜센터 및 텔레마케팅 서비스업 연간 입사율 및 퇴사율'에 따르면 효성ITX를 포함한 업계 1~5위 회사의 평균 입사율은 98.3%, 평균 퇴사율은 93.7%였다.
1천명이 입사했다고 가정했을 때 937명이 퇴사한 셈이다.
하 노무사는 "이러한 결과는 콜센터의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함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2022년 11월 9일 오후 콜센터 노동자들이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직접고용 및 처우개선 요구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2025.3.19
◇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속품으로 대하지 말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효성ITX 관계자는 19일 "회사에선 감정 노동에 따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심리 상담을 제공하고 있고 직장 내 괴롭힘을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는 소리함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단계별 악성 고객 대응 매뉴얼도 마련돼 있지만 센터별로 운영 현황은 다를 수 있다"며 "각 고객사에서 별도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일률적으로 매뉴얼을 반드시 따르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LG헬로비전 관계자는 지난 4일 폭로된 한 콜센터 관리자의 '소금 뿌리기 만행'에 대해 "CV파트너스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인사위원회를 열어 보직해제, 근무지 변경, 근신 등 나름대로 신속하게 대응해 중징계를 내린 사안"이라고 밝혔다.
다만 콜센터 상담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저희가 막연하게 뭘 드리는 거는 책임질 수 있는 발언도 아니고 해서 노코멘트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콜센터 상담사들은 자신들을 '사람'으로 존중해달라고 입을 모았다.
이씨는 "'상담사들은 비난을 들어도 된다'라는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A씨는 "회사에서 '힘들면 나가라.
새로운 사람 또 뽑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할 점"이라고 짚었다.
하 노무사는 "가장 큰 문제는 업체들이 콜센터 노동자를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속품으로 대하는 것"이라며 "사업주는 그러한 생각을 바꿔야 하고 지원금 문제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eugene@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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