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견 제조업체 A사는 공장 설비를 늘리려던 투자 계획을 보류하기로 했다. 지난해 이후 달러당 원화값이 하락하며 수입 장비를 사오는 비용이 천정부지로 뛰었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가뜩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원료 값이 올랐는데 장비 가격까지 급등했다"면서 "설비 투자를 최대한 미루고 안전에 꼭 필요한 핵심 부품만 갈아 끼우는 방식으로 지출을 줄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 B사 최고경영자(CEO)는 "지금 독일에 기계를 발주해도 1년 뒤에나 받는 상황"이라며 "대금을 미리 줘야 하는데 환율 때문에 손해가 크다"고 하소연했다.
미국발 긴축 움직임에 원화값이 추락하면서 기업들이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재료와 중간재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12일 매일경제가 한국은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화로 환산한 수입 원재료 가격은 202.82(2015년=100)로 1년 새 49.2% 급등했다.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은 것이다. 중간재 가격(138.71)도 19.6% 뛰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중간재는 1차 철강 제품이나 기초화학물질 등 제품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재화로 완제품 가격을 결정하는 잣대가 된다. 중간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수출하는 한국 산업구조는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실제로 수입 중간재 비중은 추세적으로 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컴퓨터·전자·광학기기 중간재 가운데 수입품 비중은 53.4%(2019년 기준)로 절반을 넘어섰다. 전기장비(27.8%), 기계·장비(25.1%) 산업이 수입 중간재에 의존하는 비중도 높다. 문제는 글로벌 경기 둔화로 설비 투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생산장비 가격마저 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수입 자본재(생산장비) 가격은 8.3% 올랐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미 기준금리 역전 현상이 강해지며 원화값이 떨어지고 있고,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은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성 교수는 "정부가 기업에 대한 세금을 낮추면서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전반적으로 비용 부담을 완화하는 정책을 시급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 한일 경제협력 기류 속에 양국 간 통화스왑을 맺어 원화값 심리를 안정시키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