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정치현수막 무제한 허용하더니…민원 1만4천건 폭주

홍혜진 기자(honghong@mk.co.kr)

입력 : 2023.04.16 17:24:24 I 수정 : 2023.04.16 20:12:30
막말정치 도배에 괴로운 시민
작년 12월 옥외광고물법 강행
지자체 사전허가 규제 없애
좁은 인도마다 현수막 난립
행인 시야 가려 안전사고 급증
5년간 선거용 현수막 1만4천t
대부분 불태워…발암물질 배출




정당 현수막을 장소나 수량에 관계없이 무제한으로 게시할 수 있게 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시행되면서 전국 곳곳이 현수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16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인근에 정당 현수막들이 무분별하게 걸려 있다. 한주형 기자


정치권이 정당 정책을 알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현수막 게시 제한을 스스로 없애자 전국 주요 거리가 원색적인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으로 도배되고 있다. 좁은 인도를 정당 현수막이 겹겹이 메우면서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행인이나 차량 시야를 가려 사고 위험도 커졌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정당 현수막 제한을 없앤 개정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된 지난해 12월 이후 정당 현수막이 우후죽순 내걸리면서 시민 민원도 쇄도하고 있다. 개정안이 시행된 후 석 달간 현수막 관련 민원은 시행 직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16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각 지방자치단체에 접수된 현수막 관련 민원은 지난해 9월부터 11월 말까지 석 달간 6415건이었지만 개정안 시행 후인 12월 11일부터 올 3월 20일까지는 1만4197건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민원 내용은 "현수막이 위험한 곳에 설치돼 있다" "현수막이 시야를 가려 영업에 방해된다" "소상공인은 현수막을 걸지 못하게 하면서 정당만 허용하는 이유가 뭐냐" 등이다.

현수막으로 인한 사고도 빈발하고 있다. 행안부에 따르면 올 들어 정당 현수막이 급증한 이후 전국에서 정당 현수막과 관련한 사고가 8건 발생했다. 현수막 끈에 목이나 다리가 걸려 다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북 포항에서는 가로등 사이에 현수막 4개를 동시에 걸었다가 가로등이 넘어져 행인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21년 감사원이 발간한 옥외광고물 안전관리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서울, 부산, 광주 등에서 현수막 등 옥외광고물이 추락하거나 쓰러져 발생한 사고가 총 4010건에 달했다. 연간 800건씩 발생한 꼴인데, 올 들어 현수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파로 관련 사고도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수막은 무엇보다 처리가 문제다. 폐현수막은 플라스틱 합성섬유인 폴리에스터가 주성분이라 땅에 묻어도 썩지 않는다. 눈에 띄게 꾸미기 위해 염료를 잔뜩 입혀 토양까지 오염시킨다. 일부 재활용되기도 하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다. 결국 대부분 소각 처리하는데, 이때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와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이 배출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발생한 선거용 현수막은 1만3985t에 달한다. 2주 남짓한 선거운동을 위해 생산되는 선거용 현수막은 선거 직후 상당분 소각되고, 30%는 마대나 에코백 등으로 재활용된다. 정부는 선거용 현수막 재활용률이 높은 지자체에 포상을 하는 등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실정이다.

상업용 광고 현수막까지 합하면 쓰레기 규모는 큰 폭으로 늘어난다. 행안부가 지난달 20일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최근 5년간 신고된 현수막은 약 630만건으로 연평균 126만건에 달한다.

630만건의 현수막이 생산되고 폐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150만그루 이상 나무가 필요하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플라스틱 합성섬유가 주성분인 현수막 1장이 만들어질 때 탄소 약 2.37㎏을 배출한다. 5년간 신고된 현수막이 630만건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탄소 1만4930t이 현수막으로 인해 배출된 셈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수종인 참나무 한 그루가 1년에 흡수하는 탄소량은 약 10㎏이다. 지난 5년간 내걸린 현수막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를 없애기 위해 1년에 무려 149만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소각될 때 발생하는 물질까지 고려하면 나무 수만 그루는 족히 더 필요하다.

소각도 공짜가 아니다. 선거용 폐현수막 소각에 드는 비용은 지자체가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는데, t당 약 30만원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가 법까지 고쳐 정치 현수막을 무제한으로 게시하도록 만든 것은 정책을 국민에게 빠르게 알릴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지만 시행 이후 전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다. 환경과 안전도 문제지만 현수막 내용이 상대 정당 비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정치 혐오만 키운다는 지적이다. 정치 후원금이나 국고보조금으로 정당 현수막을 제작하는 만큼 현수막 제작 비용은 사실상 국민이 부담하는 것이다.

13일 서울 송파구 재활용센터에 폐현수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충우 기자


현수막을 관리하는 지자체도 난색이다. 행안부는 지난달 14일 17개 지자체에서 정당 현수막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는데, 지자체들은 정당 현수막 관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옥외광고물법을 다시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정치권에서도 재입법 주장이 나왔다. 현재 국회에는 정당 현수막 표시 방법이나 개수, 규격, 게시 위치 등을 정하는 내용을 담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5건 발의된 상태다. 국민의힘 최영희·김성원·송석준·김미애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했고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개정안을 냈다. 개정 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 현수막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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