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사다리를 잇는 것도 법의 역할

이진한 기자(mystic2j@mk.co.kr)

입력 : 2025.02.11 17:09:56
무료 법률 서비스 봉사하는 천수이 변호사
취약층 돕는 법률홈닥터 활동
경험담 에세이집 출간해 화제
어린 시절 서울 달동네서 자라
이웃들 돕고자 변호사 길 택해
도움준 아이 월급 기부때 보람
사랑이 법의 빈틈 메울때 있죠






법률홈닥터 변호사로 활동한 천수이 변호사.


2012년 도입한 '법률홈닥터'는 법적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에게 법무부 소속 변호사가 각종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다. 이들은 구청 등 기관에 상근하면서 의뢰인들을 돕는다. 직접 소송을 맡지는 않지만 전화나 온라인 채널을 통한 서비스도 지원하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 시행 초기 20개 지역에서 시작해 현재는 65개 기관에서 65명의 변호사가 활동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는 2016년부터 2년간 법률홈닥터 변호사로 근무한 천수이 변호사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에세이집이다. 올해로 10년 차 변호사가 된 그는 글쓰기를 통해 당시 활동을 정리하면서 의미도 재발견했다고 한다. 천 변호사는 최근 매일경제와 만나 "법률홈닥터 경험은 법의 빈틈을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 시간"이라고 밝혔다.

서울 마포구와 동작구에서 근무했던 천 변호사의 의뢰인은 주로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 고령층, 외국인 근로자였다. 별도로 사무실을 배정받지 못해 하루 평균 예닐곱 명을 구청의 복도 한쪽에서 맞아야 했다. 그 덕에 구청을 찾은 일반 민원인들도 종종 그에게 법적 자문을 구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고성은 물론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노숙인은 칼을 들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 같은 생활은 한 달 동안 계속됐다. 싸우기를 반복하며 마음이 날카로워질 때도 있었다. 어느 날엔 힘들게 연락이 닿은 의뢰인에게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못 도와준다"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러자 '먹고사는 데 바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답을 들었다는 천 변호사는 "아버지보다 더 연배가 높은 의뢰인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떠올렸다.

천 변호사는 법률홈닥터로 일하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일에 치이는 와중에도 학점은행제로 틈틈이 수업을 들었다. 다른 복지사들과 협업하며 의뢰인들을 돕는 데 열성을 다했다. 가욋일이 늘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 극단적 선택을 하면 자녀에게 빚이 상속되는지 묻는 의뢰인에겐 다시 살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온갖 사회적 지원책을 소개한 경험도 전했다.

천 변호사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의뢰인이 많다 보니 단골 상담 유형도 생겼다"며 "누군가에게 돈을 갚지 못해 고소를 당하거나, 임대차 계약 만료로 분쟁 중인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고픔을 못 이겨 절도를 저지르는 '장발장형 범죄'도 자주 접한다"며 "한번은 사정이 너무 딱해 선고유예를 기대했는데 집행유예 처분을 받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온정이 아쉬웠던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사회 취약계층이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경제·사기 범죄에 더욱 취약해지는 점도 우려했다. 범행 방식이 복잡해지면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선처를 받을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법이 아닌 관용으로 사건을 해결할 때 더 큰 울림을 얻는 까닭이다. 천 변호사는 "장기 임차하던 30대 손님 때문에 불이 나 모텔을 닫게 된 할머니 사건"이라며 "처음에는 손해배상 방법을 문의하려나 했는데, 1시간 동안 그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넋두리처럼 털어놨다"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엔 청년의 처지가 자신의 옛 모습 같아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며 떠났다"고 회상했다.

최근에는 무료 변론을 맡으며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로 스토킹 범죄 피해자, 한부모가정, 장애인권시설에서 법적 대리인 업무와 일상생활 복귀를 돕고 있다. 또 송사 경험을 쌓으며 다시 법률홈닥터와 같은 활동을 할 목표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활동의 동력은 과거 서울의 달동네였던 난곡동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이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공부방에서 이웃들과 함께 자랐다. 경제적 이유 못지않게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변호사를 꿈꿨다.

극심한 양극화로 끊어진 계층 간 성장 사다리를 비롯해 제도적 공백을 체감할 때면 관심의 가치를 상기한다.

천 변호사는 "공부방에서 도움을 받던 아이가 성장해 취업하고 첫 월급을 기부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봉사활동을 이어갈 힘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도의 공백과 관련 기관의 부실 대응, 사람들의 무관심이 합쳐지면 문제가 발생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며 "법적인 접근보다 의뢰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 해법을 찾았던 경험을 살려 법제도의 빈틈을 채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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