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스트레스 테스트에도 막지 못한 SVB 파산… 중소형 은행 파산 이후 최악의 시나리오는?

박지훈 LUXMEN 기자(parkjh@mk.co.kr)

입력 : 2023.03.24 10:56:39
시가총액 약 277조원(2120억달러)의 미국 내 16위 규모의 실리콘밸리은행(이하 SVB)이 파산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4시간이었다. 지난 3월 10일 우리나라 산업은행 자산 규모와 유사한 대형 은행인 SVB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너져버린 것이다. 암호화폐 전문은행 실버게이트와 시그니처뱅크 파산에 이어 미국 실리콘밸리의 지방은행인 SVB가 무너지자 주요 은행들의 주가 폭락과 함께 은행권의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공포심이 확산되고 있다.

SVB의 역대 최대급 파산 속도만큼 백악관의 개입도 재빨랐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조기 진화에 나섰다. 미국 정부는 바로 전액 보장을 약속했다. 원칙적으로 25만달러로 정해진 보장한도를 무한대로 늘린 것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가 다른 은행들로 위험이 전이되는 걸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유동성 지원에 나섰지만 전 세계 자산 시장은 여전히 불안한 눈길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SVB의 파산은 자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채권 투자에서 대규모 미실현 손실을 초래했고 연준의 금리 인상 이후 메말라버린 지급준비금으론 예금자 뱅크런을 막기엔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SVB와 유사한 자산구조를 지닌 다수의 중소형 은행들에 위험이 전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SVB와 같이 아직 겉으로 손실이 난 것은 아니지만 미국 은행들의 장부상 손실, 즉 미실현 손실액은 지난해 말 기준 약 807조원(6200억달러)에 달한다. 이번처럼 예상 밖에 현금이 필요할 때 비슷한 재무구조를 가진 중소형 은행들은 가지고 있던 증권을 팔아야 해 미실현 손실은 그대로 실제 손실로 이어져 뱅크런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스타트업의 자금줄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사진 연합뉴스>


2008년 금융위기 재현 가능성은 낮아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 연준과 예금보험공사(FDIC)가 모든 예금을 보증하기로 했다. 또한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채권 등의 자산을 액면가로 담보대출 해주는 BTFP라는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를 통해 기관이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2008년 이후 대형 은행들이 강력한 규제하에 체력을 키워 시스템 위험 확산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주목할 점은 미국 소형 은행의 대출 규모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미국 상업은행 전체 대출 12조달러 가운데 대형 은행은 6조5000억달러, 소형 은행은 4조500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대출 증가 속도는 2022년 11월 이후 오히려 소형 은행들의 대출 증가 속도가 더 빨랐다. 반면 소형 은행 예금이나 현금 보유 규모는 대형 은행에 비해 적다. 대형 은행 대출 대비 소형 은행 대출 비중은 70%인 데 비해 예금은 51%, 현금 비중은 33%에 불과한 상황이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상대적으로 미국 소형 은행들의 현금 여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아무리 정부가 보증한다고 해도 SVB 은행 예금자라면 예금을 더 안전한 대형 금융기관이나 단기 MMF 등으로 이전해 다변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라며 미국 지역은행들의 위기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 내다봤다.



또한 소형 은행들의 신용 위험이 커지면서 미국 기업들의 자금 조달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연준의 대출 서베이(Senior Loan Officer) 조사에 따르면 미국 소형 은행들의 상업 대출에 대한 신용 위험은 과거 경기 침체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출 공급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금리가 상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허재환 연구원은 이에 대해 “신용 위험과 대출 기준이 높아지면서 타격이 예상되는 곳은 기술·바이오 기업과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 등이다”라며 “SVB 파산 이후 이들의 자금 조달은 어렵고,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 내다봤다.

SVB 사태 왜 예측하지 못했나?
SVB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큰 은행으로 IT 창업 기업들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유치했다. SVB는 유치한 자금의 상당수를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 재무부 채권은 이른바 ‘안전자산’의 대명사로 통하기 때문에 은행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투자처라는 점에서는 SVB의 선택에 큰 허점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40년 만에 찾아온 역대 최고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행한 고강도 긴축에 나서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SVB에 자금을 위탁했던 실리콘밸리의 상당수 창업 기업은 지난 2020년 찾아온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침체 기미를 보이자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차원에서 자금을 대거 찾기 시작했다. 현금 부족 사태에 직면한 SVB는 막대한 손해를 무릅쓰고 미 국채를 팔았다.

결국 채권 가격이 폭락한 뒤에 내다 팔면서 손실만 약 2조3000억원(18억달러)에 달했다. 이후 SVB가 자금 확보를 위해 22억5000만달러를 신주 발행에 나서자 위기를 감지한 예금자들의 대규모 인출 사태가 벌어졌다. 긴축 과정에서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등의 대응이 부족했던 SVB는 뱅크런 사태 2주 전 CEO의 250만달러 규모의 주식 매도와 임원들의 각 14만달러 셀프 성과급 지급으로 여론을 통해 파산의 원죄까지 짊어지게 됐다.

그렇다면 SVB 파산 징후는 왜 금융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되지 않은 걸까?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애꿎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소환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민주당 측은 SVB의 파산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시의 은행 규제 완화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형 은행에 매년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도록 하고 자본 확충을 강제하는 ‘도드-프랭크 법’의 자산 기준을 500억달러에서 2500억달러로 높이는 법안에 서명했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금융기관들이 가상의 위기 시나리오를 견딜 수 있는지 측정하는 것으로,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제도가 자산이 2500억달러 이상인 은행들을 대상으로 매년 시행한다. 연준은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세부적인 건전성 규제 기준을 조정하기도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500억달러 이하 자산 규모를 가진 은행은 스트레스 테스트를 2년에 한 번 받거나 면제하도록 했다.

SVB의 모회사인 SVB파이낸셜그룹의 지난해 연간 보고서(10-K)를 보면, 회사는 “2022년 말 회사의 총자산은 2118억달러”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SVB는 스트레스 테스트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SVB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과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규제도 적용받지 않았다. 이들 규제는 은행이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유동성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아두게 하는 내용이다. SVB는 자산 규모 기준이 상대적으로 작은 탓에 이런 규제를 적용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해당 법이 제정되자 중소 규모 은행들은 규제 완화를 위해 수년에 걸쳐 의회에서 로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바이든 정부는 다시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의회와 당국이 은행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트럼프 정부에서 부활시키려던 ‘글라스-스티걸법(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분리)’도 SVB 사태를 계기로 다시금 도입 논의가 불붙고 있다. 당시 월가는 트럼프의 규제 완화에 역행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옐런 장관은 글라스-스티걸법 도입과 관련해 “현재는 은행 시스템의 안정화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며 “시간을 가지고 규제 및 감독 체계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을 고민해보겠다”라고 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SVB 사태 이후 은행규제와 감독을 검토해 현재 직면한 위험을 해결하는 데 적절한지를 확인할 것이라 밝혔다.


올해 스트레스 테스트 중소형 은행 파산 예상했다?
연준은 지난 2월 2023 스트레스 테스트 시나리오를 공개했다. 연준은 보통 스트레스 테스트를 ‘기본’과 ‘부정적’ 가정으로 나눠 진행하지만, 올해는 기본과 매우 부정적(severely adverse) 등 2개 시나리오를 가정하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연준은 ‘시범적 시장 충격(exploratory market shock)’ 요소를 올해 최초로 도입해 예비 점검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시범적 시장 충격이란 글로벌 경기 침체가 덜 심각한 가운데, 높은 기대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 상승 압력은 강한 상황을 가리킨다. 시범적 시장 충격 아래서는 주요 금융변수와 상품 가격의 움직임이 심각한 침체 상황에서 예상되는 움직임과 정반대를 향한다. 비교적 강한 침체 상황이라면 미 국채금리와 달러 가치, 상품 가격은 내려가지만, 시범적 시장 충격하에서는 국채금리가 오르고 달러 가치는 절상되면서 공급망 장애 등에 따라 상품 가격이 상승한다.

한국은행 측은 “연준이 스트레스 테스트의 매우 부정적인 시나리오에 더해 경제·금융 변수의 움직임이 정반대인 시범적 시장 충격 요소를 추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는 연준이 향후 물가 전망의 불확실성을 그만큼 크게 본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한편 연준의 매우 부정적 시나리오에는 극심한 글로벌 경기 침체 상황으로서 장기간 이어진 주택 및 상업용 부동산 가격 하락이 기업 부문으로 파급되고 투자심리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가정했다. 또한 은행과 거래하는 ‘거래상대방의 부도’도 포함됐다. 거래자산 규모와 위탁업무 비중이 큰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거래 비중이 가장 큰 상대방(Largest counterparty)의 부도 상황을 추가한 것이 눈에 띈다. 최근 은행들의 파산이 시나리오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거래자산 규모가 큰 금융기관(거래자산 및 부채가 500억달러 이상이거나 총 자산의 10% 이상)에 대해서는 주요 선진국 및 신흥시장국의 주가, 환율 및 금리, 주요 상품 가격, 신용스프레드 등 관련 위험 요인도 추가했다. 매우 부정적인 시나리오의 글로벌 시장 충격 요소 상정 시 예상되는 주요 금융변수 및 상품 가격의 움직임은 ①국채금리 하락 ②달러화 절하 ③상품 가격 하락이다. 연준은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firm-specific results)와 함께 올 6월에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은행 측은 “연준이 스트레스 테스트의 매우 부정적인 시나리오에 더하여 경제 및 금융변수의 움직임이 정반대인 시범적 시장 충격 요소를 추가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는 향후 인플레이션 전망의 불확실성을 그만큼 크게 본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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