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조합장의 내밀한 세계...대선·총선·지방선거 이은 ‘제4의 선출직’ 파워

정혁훈 전문기자(moneyjung@mk.co.kr)

입력 : 2023.03.01 20:47:29 I 수정 : 2023.03.01 21:00:29
이달 8일 지역농협 조합장 전국동시선거
전국 각지 농협 1113곳 이끌 리더 선출


술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작년엔 대선과 지방선거가 있었고, 내년엔 총선이 있는데, 올해는 선거가 없네. 조용하겠구먼.”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며 “곧 농협조합장 선거가 있지 않냐”고 핀잔을 주듯 말한다.

이에 또 다른 친구가 바로 맞받아친다. “조합장 선거는 농협에서 알아서 하는 것일 텐데, 비교가 되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적어도 조합장 선거를 농협에서 알아서 한다는 건 팩트가 아니다. 조합장 선거 실무는 농협의 위탁을 받아 정부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담당한다. 농협조합장 선거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와 마찬가지로 전국동시선거다. 조합장 선거를 전국 ‘4대 선거’ 중 하나로 칭하는 배경이다.

◆ 중앙선관위에서 주관하는 조합장 선거

지금 농촌지역에서는 농협조합장 선거가 최대 이슈다. 지난달 23일부터 시작된 2주간의 공식 선거운동이 끝나면 오는 8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국에서 동시에 조합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진행된다.

조합장 선거는 도시지역에서는 관심 밖이지만 농촌 주민들은 생활 자체가 지역농협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대선·총선 못지않게 높은 관심 속에서 진행된다. 특히 선거에 나선 조합장 후보들이 대부분 지역 주민이라는 점에서 선거전의 치열함은 대선·총선을 능가하고도 남는다는 평가도 있다.

지역농협조합장의 전국동시선거는 이번이 세 번째다. 그 이전에는 지역농협별로 선거 시기가 전부 달랐다. 지역농협 자체적으로 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조합장 선거를 둘러싼 불법과 비리가 일정 수준을 넘었다고 판단한 농협이 2005년부터 선관위에 선거를 위탁했고, 2015년부터는 모든 지역농협조합장의 임기를 통일해 전국동시선거로 실시하고 있다.

그렇게 뽑는 조합장 숫자는 1113명에 달한다. 전국 지역농협 숫자만큼 조합장을 뽑는 것이다. 지역농협이라 하면 가장 많은 지역농협을 비롯해 지역축협, 품목농협, 품목축협, 인삼농협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 지역농협의 전국 조합원 수는 207만7514명(2023년 1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농민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또한 지역농협 소속 직원 숫자는 8만4718명이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는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의 연합체로 별도로 존재한다. 산하에 경제지주·금융지주·자회사를 포함해 총 2만7855명이 중앙회 소속으로 근무한다.

조합장 선거가 얼마나 치열한지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제3회 조합장 전국동시선거와 관련한 법 위반행위 건수가 지난달 말 기준으로 고발 80건, 수사의뢰 9건, 경고 170건 등 등 총 259건에 달한다. 선거 때마다 위반 행위가 끊이지 않자 중앙선관위가 이달 1일부터 8일까지를 ‘돈 선거 근절 특별단속기간’으로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선관위는 전국 시도 사무처장이 참석한 영상회의를 통해 “고질적인 돈 선거 관행을 타파하고 깨끗한 선거 질서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단속 역량을 집중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조합장 선거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 당선되면 연봉 1억~2억원에 업무추진비

농협조합장이 도대체 어떤 자리길래 위반행위를 해서라도 선출되려고 하고, 중앙선관위까지 나서서 전국동시선거를 실시하는 것일까.

조합원들의 투표를 통해 조합장에 당선되면 4년간 지역농협을 이끌게 된다. 조합장은 지역농협에서 수행하는 경제사업과 신용사업 업무를 총괄하고, 지역농협당 평균 76명에 달하는 직원에 대한 인사권도 행사한다. 한마디로 농촌 경제의 근간이 되는 지역농협의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것이다.

각 지역농협 자산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1억원 전후의 연봉과 함께 상당액의 업무추진비를 제공받는다. 규모가 큰 도시농협의 경우 연봉이 2억원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명을 요구한 조합장은 “조합장에 당선되는 순간 농촌에서 가장 큰 기관의 리더가 되는 것”이라며 “내 사업체를 하나 얻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당선되면 연봉 최대 2억 받지만
지역유지 대접 보상이 훨씬 커
인적 네트워크·지명도 등 높여
새로운 정치적 발판 만들수도
그런데 이 같은 경제적인 보상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다. 많은 조합장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돈만 생각해서는 조합장이 되는 게 오히려 손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합장은 선출직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유권자인 조합원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서 연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의 대소사를 챙기고 평소 친분을 쌓기 위해서는 급여와 업무추진비로 충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보상보다는 조합장이 되는 순간 지역 유지로 대접받는 보상이 훨씬 더 크다고 말하는 조합장이 많다. 조합장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선출직이다 보니 지역 대표 대우를 받는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지역 밀착형 선출직인 조합장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조합장이 가진 지역 표가 다른 정치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나 국회의원이 주최하는 행사마다 조합장이 단골 초대손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조합장이라는 자리가 새로운 정치적 발판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조합장을 하면서 쌓아둔 지역의 인적 네트워크는 좋은 정치적 자산이 된다. 재선을 준비 중인 한 조합장은 “지역농협에서 조합장으로서 이룬 성과를 개인 역량의 하나로 홍보하기 좋다”며 “지역에서 지명도를 높이는 데 조합장만 한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 현재 4선 이상 조합장만 112명에 달해

조합장 선거가 지역에 따라 과열되는 것은 이처럼 조합장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선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超)다선 조합장이 다수 탄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역농협별로 집계한 조합장 선수(選數) 현황을 보면 10선이 1명, 9선이 3명, 7선이 1명, 6선이 17명, 5선이 25명, 4선이 65명 등 4선 이상이 112명에 이른다. 이처럼 초다선이 가능한 것은 상임조합장은 3연임 제한이 있는 반면 비상임조합장은 연임 횟수에 아무런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산이 2500억원을 넘어서는 지역농협은 비상임조합장 체제로 운영해야 한다.

대신 기업 전문경영인(CEO)처럼 상임이사를 두도록 돼 있다. 비상임조합장은 대표권만 갖고, 경제사업이나 신용사업은 상임이사 담당이지만 실제로는 비상임조합장이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사례가 많다. 현재 전체 지역농협의 43.7%에 달하는 486곳이 비상임조합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지역농협 10곳 중 4곳에서 횟수 제한 없는 다선 조합장이 탄생할 수 있는 구조다.

현재 4선 이상만 무려 112명
서울 관악조합장은 11선 도전
현재 최다선에 해당하는 10선의 박준식 서울 관악농협조합장은 이번에 11선에 도전한다. 9선인 김의영 대전원예농협조합장과 이주선 아산 송악농협조합장은 10선에 도전하고, 홍성주 제천 봉양농협조합장은 단독 후보여서 사실상 10선을 확정 지었다.

농협조합장 교체율도 다른 선거에 비해 낮은 편이다. 지역농협조합장의 초선 당선 비율은 2015년 1회 전국동시선거 때 41.7%, 2회 선거 때는 41.8%에 그쳤다. 이는 2020년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교체 비율 58.2%, 작년 광역지자체장 선거 교체 비율 76.5%에 비해 낮다. 이번 3회 전국동시선거에서도 2590명이 후보자로 등록해 평균 당선 경쟁률이 2.3대1에 그쳐 2회 선거 때의 2.6대1에 비해 낮았다. 더구나 20%에 해당하는 223개 지역농협은 단독 입후보여서 사실상 무투표 당선이 확정적이다. 무투표 당선율 또한 2회 선거 때의 13.6%보다 높아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인물의 조합장 진출은 줄어들고, 고령화는 갈수록 심화될 처지다. 현재 조합장의 나이 분포를 보면 70대 이상이 전체의 24.5%, 60대가 67.5%로 조합장 중 92.0%가 60대 이상이다. 조합장 10명 가운데 9명이 직장으로 치면 정년퇴직 나이를 넘긴 셈이다. 30대 조합장은 단 한 명도 없고, 40대 조합장도 전국에 단 2명뿐이다. 민승규 세종대 석좌교수는 “농업에 첨단기술이 적용되면서 이른바 ‘스마트 농업’이 농촌지역에서도 확산되고 있는데, 지역농협조합장의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엇박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가공·유통·투자 업무 계속 늘어
조합장도 경영 마인드 갖춰야
◆ 현직 조합장에게 유리한 선거제도 고쳐야

조합장의 다선화·고령화는 지역농협이 농업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지역농협의 신용사업은 기본적으로 금융업 성격이 강한 만큼 해당 분야의 경험이 부족한 조합장이 역량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사업도 갈수록 비즈니스 성격이 강해지고 있어 단순히 영농 활동만 한 사람보다 농산물 가공이나 유통 등 사업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한 3선 조합장은 “지역농협 업무 중 전통적인 농업이 아니라 투자와 금융에 관련된 업무가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농업을 잘하니까 조합 일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 통하기 어렵다”며 “결국 어떤 조합장의 경영 마인드가 더 강한지가 지역농협의 성과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역량 있는 조합장의 지역농협 진출을 늘리려면 현직 조합장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짜여 있는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능한 인물 진출 늘리려면
후보자 공개토론회 차단 등
깜깜이 선거제도 개선해야
가장 큰 문제로는 후보자 공개 토론회 등과 같이 조합원이 후보자의 정책과 정견을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는 점이 꼽힌다. 조합장 선거운동은 위탁선거법에서 정한 대로 행해지는데 법 제정 당시에 기존 농협법에 있었던 ‘후보자 합동연설회’가 삭제됐다.

또한 법 제정 당시 의원 발의안에 있었던 ‘언론기관 토론회’ 조항도 국회 법안심사 과정에서 삭제됐다. 현행 조합장 선거에서는 조합원이 후보자 간 정견 발표나 토론회를 접할 기회조차 없다.

또한 후보자 1명 이외에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고, 벽보와 어깨 띠, 전화, 문자, 조합 홈페이지, 명함 돌리기 말고 다른 선거운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선거운동을 이처럼 제한하는 것은 과열과 부정을 막기 위한 조치지만 유권자의 알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문제가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정빈 서울대 교수는 “현행 조합장 선거제도는 현직에게 유리한 불공정 운동장”이라며 “누가 후보인지 잘 모르는 깜깜이 선거를 조장하고, 후보자는 정책과 정견을 알리기보다 금품선거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일정한 기준 내에서 후보자 간 정견 발표나 토론회 등 유권자의 알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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