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시장 진입 못한 韓제조업…반도체도 6대분야 중 5개 밀려

김금이 기자(gold2@mk.co.kr)

입력 : 2023.03.21 17:45:00 I 수정 : 2023.03.22 14:05:19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설계부터 제조·소재·장비에 걸친 가치사슬(밸류체인) 가운데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미국과 대만 등 해외 기업에 큰 격차로 밀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한 기업에서 진행하는 종합반도체(IDM)시장에서는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한국 기업이 높은 경쟁력이 있지만, 나머지 분야에선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의미다. 세계 1위로 꼽히는 조선 분야에서도 한국 업체의 영업이익률은 1%를 밑돌며 고부가가치 설계 분야에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제조강국이 되려면 산업별로 고부가가치 분야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매일경제신문 비전코리아 프로젝트팀이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함께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465조원 규모인 전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7.3%(253조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꼽히는 파운드리 분야에선 점유율이 대만(38%)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9%에 그쳤다. 소재, 장비, OSAT(외주 반도체 패키지·테스트), 유통 분야에서도 미국, 대만, 독일 등에 밀려 미미한 점유율을 나타냈다.

IDM 사업에선 한국이 45%로 미국의 48%에 이어 높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의 주력 사업인 메모리 반도체는 대부분 하나의 기업이 설계부터 생산까지 도맡아 하기 때문에 IDM으로 분류된다. IDM 분야 평균 영업이익률은 30% 수준으로 다른 산업과 비교할 때 수익성이 높지만 파운드리와 특수 장비 분야에선 이보다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와 4분기에 연이어 파운드리 대표주자인 대만 TSMC에 세계 반도체 매출 1위 자리를 내줬다.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설계와 생산이 분화되면서 다국적 기업들도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설계(팹리스), 소재, 장비, OSAT, 파운드리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전 세계 상위 50개 반도체 회사 중 IDM 업체는 2001년 36곳에서 2021년 19곳으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팹리스 업체는 9곳에서 18곳, 파운드리 업체는 2곳에서 5곳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한국에선 반도체업계뿐 아니라 조선업계에서도 수익성이 낮은 영역에 집중된 제조 역량이 미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 조선업계가 최근 주력하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경우 선박을 건조할 때마다 핵심인 화물창 관련 원천 설계 기술을 보유한 프랑스의 GTT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다. GTT의 영업이익률은 5%를 웃돈다. 부가가치가 높은 '부유식 생산·저장·하역·설비(FPSO)'도 운영 시스템과 핵심 화학공학 기술은 유럽 기업들에 의존하고, 국내 조선사는 하부 구조물만 제작하는 일이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이 이끌어가던 디스플레이시장에서도 중국의 추격에 1위 자리를 내주면서 국가 차원의 고부가가치 기술 육성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디스플레이시장에서 중국은 2021년 점유율 41.5%로 한국(33.2%)을 앞지른 후 격차를 벌리고 있다.



산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은 파인메탈마스크(FMM), 노광기 등 핵심적인 소재·부품·장비에서 해외 의존도가 매우 높다. 남상욱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이 초격차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선 OLED 장비·소재 1위 기술을 확보해 밸류체인의 약점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조선·디스플레이 등 국내 경제를 이끌어가는 대표 산업군에서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선 수출 대기업뿐 아니라 밸류체인을 형성하는 다양한 강소기업의 역할도 강조된다. 대체가 불가한 기술력을 가진 강소기업을 잘 육성한다면 단순히 대기업의 하도급업체를 넘어서 '갑'인 발주 업체를 상대로 협상 우위를 지니는 '슈퍼 을' 기업으로 자라날 수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같은 국내 반도체 대기업도 네덜란드 ASML,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 같은 슈퍼 을 장비 업체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액은 265억9000만달러로 수출액(93억7000만달러)의 3배 수준이며, 무역수지 적자는 172억2000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한국이 독점적으로 세계시장에 공급하는 품목은 많지 않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수출시장 1위 품목은 77개로 세계 10위를 기록했다. 중국이 1798개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독일(668개), 미국(479개), 이탈리아(201개), 일본(154개) 순이었다.

김아린 무역협회 연구원은 "우리나라의 1위 품목에서 중국·일본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며 "R&D 역량 강화와 제품 차별화 등을 통해 차세대 유망 품목 육성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강소기업 육성을 위해 해외 대비 높은 상속세 부담과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이공계 인재를 제조업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또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산업 인력 부족에 대응해 제조 현장 인재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해외 고급·숙련 인재 유치를 위해 특정활동(E-7) 비자 발급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김금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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