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불꺼진 빈집이 '마을호텔'로…폐점 속출하던 일본 '샷타도리'의 기적

옛 기모노가게 간판 단 간직한 프런트서 체크인…지물포·물리치료원이 '비밀 객실'"마을 일상을 느끼러 찾아와요"…오사카 외곽 후세역 상권 살린 세카이호텔의 실험
차대운

입력 : 2025.05.16 06:00:07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온 상점가
(오사카=연합뉴스) 일본 오사카 외곽 후세역 앞 상점가에서 관광객들이 걸어가고 있다.2025.5.16 [세카이 호텔 홈페이지]cha@yna.co.kr(끝)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저희는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에요.

손님들이 여기 사람들의 일상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주민 일상과 여행자 사이 균형을 맞춰 나가고 싶어요." 상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 쇠락하는 상가인 '샷타도리'(シャッタ-通り)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일본에서 주목받은 세카이(SEKAI) 호텔 매니저 키타가와 마리씨는 지난 14일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세카이 호텔은 오사카(大阪) 동쪽 외곽인 후세(布施)역 인근 시장통에 스며든 독특한 '마을 호텔'이다.

옛 기모노가게가 이젠 호텔 프런트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일본 오사카 후세역 앞에 자리잡은 세카이 호텔의 프런트 공간.폐업한 여성용 기노모 가게가 있던 곳을 카페풍으로 개조한 뒤 예약 고객을 맞이하는 프런트 공간으로 쓰고 있다.2025.5.16 cha@yna.co.kr(끝)

일반 호텔처럼 한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시장통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방치된 여러 빈집과 폐업한 가게들을 산뜻하게 리노베이션해 객실로 쓴다.

손님들은 '여성복 키요시마'라는 옛 기모노 가게 간판을 그대로 남긴 프런트 사무실을 찾아와 체크인한다.

이어 문을 닫은 지물포, 과자가게, 물리치료원을 고쳐 만든 객실을 배정받는다.

객실 안은 세련된 현대식 디자인으로 완전히 새로 단장됐지만 겉모습만큼은 옛 모습을 그대로 무심코 지나면 이곳에 호텔 객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옛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끔히 차려진 '비밀의 객실'로 이어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호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온 마을이 호텔 기능을 나눠 맡고 있다는 점이다.

옛 지물포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비밀 객실'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일본 오사카 후세역 앞에 자리잡은 세카이 호텔의 객실.지물포가 있던 2층 목조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만들었다.시장통에 있는 건물의 외관은 최대한 살리면서 건물 내부는 현대식 디자인으로 새단장했다.2025.5.16 cha@yna.co.kr(끝)

호텔은 손님을 맞는 프런트 공간과 마을 곳곳에 있는 객실만 직접 운영한다.

식당, 목욕탕 같은 부대 시설을 따로 갖추고 있지 않은 대신 고객들을 협력 관계를 맺은 오랜 동네 가게들로 안내한다.

아침은 동네 할머니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일본식 찻집 킷사텐(喫茶店)에서, 저녁은 시장통의 왁자지껄한 이자카야에서, 여행 피로를 푸는 목욕은 장작불로 물을 끓인 65년 전통의 대중목욕탕인 센토(錢湯)에서 하는 식이다.

세카이 호텔 이용객들이 이용하는 '동네 목욕탕'
(오사카=연합뉴스) 일본 오사카 후세역 앞에 자리잡은 세카이 호텔 숙박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동네 목욕탕 '센토 2025.5.16 [세카이 호텔 홈페이지]cha@yna.co.kr(끝)

호텔은 손님들이 마을로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주변 상인들과 협력해 갖가지 체험을 기획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쏟는다.

세카이 호텔이 만든 상세한 동네 지도는 이런 노력의 결집체다.

생딸기가 든 일본식 찹쌀떡을 파는 80년된 화과자점부터 4대에 걸쳐 100년간이나 이어지는 빵집 같은 동네의 먹을거리, 즐길 거리 정보가 빼곡하다.

호텔에 묵으면 이곳 숙박객임을 표시하는 파란색 명찰 같은 '세카이 패스'를 준다.

테마파크 자유이용권 같은 패스를 몸에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니면 공짜 맥주 같은 뜻하지 않은 특별한 환대를 받을 수 있다.

"세카이 패스 들고 다니면 대접받아요"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일본 오사카 세카이 호텔 앞에서 호텔 매니저 기타가와 마리씨가 이 호텔이 제공하는 '세카이 패스'를 들어 보이고 있다.이 패스를 들고 협력 가게에 가면 한잔 공짜 맥주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2025.5.16cha@yna.co.kr(끝)

이처럼 호텔의 온 기능이 마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니 세카이 호텔은 시장 상인들이 쉬는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아예 숙박 손님을 받지 않는다.

세카이 호텔은 후세역 일대 10개 건물에 23개 객실을 운영하며 하루 최대 94명까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객실은 침대 하나만 제공하는 도미토리부터 6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독채형까지 다양하다.

이곳에서 누리는 평온한 마을 여행 경험이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숙박객도 크게 늘었다.

개업한 2018년 300명 수준이던 숙박객은 작년 4천200여명까지 불어났다.

여행객 유입으로 지역 상권에 온기가 돌자 지역 상인들은 반긴다.

튀김 가게를 운영하는 우메 야마씨는 "호텔이 들어오기 전후를 비교한다면 확실히 손님이 늘었다"며 "세카이 호텔에 묵는 고객만 매일 평균 5∼10명 우리 가게에 찾아오는 것 같다"고 전했다.

손님들이 줄 선 튀김 가게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일본 오사카 외곽 후세역 앞 시장에 있는 튀김가게에 손님들이 줄을 서 물건을 사고 있다.이곳 상인들은 세카이 호텔이 들어와 마을에 활기가 돌면서 손님들이 늘었다며 반긴다.2025.5.16cha@yna.co.kr(끝)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가게와 집들을 동네를 살리는 '마을 호텔'로 바꿔놓은 세카이 호텔 사례는 심각해지는 빈집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본에서 주목받았다.

세카이 호텔이 있는 후세 지역은 행정구역상 오사가 옆 히가시오사카시에 있다.

이곳은 1914년 후세역이 생긴 이래로 100년 가까이 크게 번성했던 상권이었다.

간사이(關西) 지역 핵심 도시인 오사카와 인근 도시 나라(奈良)를 잇는 교통 요지라 두 도시를 오가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핵심 상권으로 클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대 전철 노선이 확충되고 오사카 도심 난바(難波), 우메다(梅田) 중심의 거대 상권이 형성돼 일대 유동 인구를 모두 빨아들이면서 후세역 상권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의 인구의 전반적 감소와 소도시 위축 현상이라는 요인까지 더해졌다.

후세역 일대가 '쇼와(昭和)시대'(1901∼1989년)에서 시간이 멈춘 듯 낡은 상권으로 전락하게 된 배경이다.

전성기 700여개에 달하던 점포가 절반인 350여개 수준으로 줄어 전형적인 '샷타도리'가 됐다.

그래도 세카이 호텔이 온 뒤로는 문을 닫는 가게가 줄고, 거꾸로 새로 문을 여는 가게도 많이 늘었다.

기타가와씨는 "옆 커피집도 1년 전 새로 생기고 전체적으로 새 가게가 들어오는 분위기"라며 "제가 여기서 일한 지난 5년간 20여개 가게가 문을 연 것 같다"고 전했다.

활기 되찾은 후세역 앞 상점가
(오사카=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일본 오사카 외곽 후세역 앞 시장에서 행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고 있다.쇠락해가던 상권은 빈집을 개조한 세카이 호텔 입점 이후 다시 활기를 띠고 잇다.2025.5.16cha@yna.co.kr(끝)

세카이 호텔의 이색적인 '마을 호텔' 실험이 성공하는 데는 소멸해가는 지역을 살리고자 하는 지역 사회의 간절함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호텔은 객실로 쓰는 건물을 직접 사들이지 않고 소유주에게 임대해 쓴다.

그런데 일부 건물주는 임대료를 전혀 받지 않고 건물까지 직접 고쳐 객실로 쓰라고 내주기도 했다.

기타가와씨는 "올해 3개 건물이 새롭게 생겼는데 주인 분들이 건물을 새로 세워 주시고 영업권을 주셨다"며 "저희에게 건물을 제공해준 분들은 여기 투자해 이익을 얻는 것보다는 지역 활성화에 더 공감해 투자한다"고 말했다.

세카이 호텔의 사례는 한국에서도 지방을 중심으로 점차 심각해지는 빈집 문제 해결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는 평가다.

정부에 따르면 작년 말 전국 243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행정조사 결과 전국 빈집은 13만4천9호에 달했다.

이 중 42.7%인 5만7천223호가 89개 인구 감소 지역에 있다.

한국에서도 세카이 호텔처럼 빈집을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고쳐 일대 주거 환경도 개선하고 지역 경제에도 온기를 주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부산 동구가 관내 산복도로 지역 초량동 일대에서 빈집 50개를 활용한 도시 민박촌을 조성하겠다고 올해 초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부산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나아가 정부는 빈집을 숙박 시설로 활용하는 데 장애가 되는 각종 규정도 손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세카이 호텔과 같은 업태는 '민박업'으로 구분돼 운영자가 반드시 해당 건물에 주소를 두고 실거주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여러 개의 빈집을 함께 관리하면서 숙박객에게 빌려주는 세카이 호텔 같은 체계적인 사업을 하기가 어렵다.

이에 정부는 지난 1일 발표한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에서 '빈집 재생 민박업'의 개념을 새로 도입하기로 했다.

행안부 관계자는 "빈집 재생 민박업은 개인 외 법인이나 단체도 영위할 수가 있고 민박업과 달리 실거주 의무를 예외로 둔다"고 설명했다.

cha@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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